폭풍의 브랜드 도전기 Ep. #04 신화와 전설 그리고 상징
화장품 브랜드를 기획하는 데 있어서 이런 선후가 뒤바뀐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는 제품에 담길 내용물과 그 기술에 대한 노하우가 많이 축적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난 10년, 우리는 많은 화장품 브랜드를 기획하고, 설계하고 생산해 왔다. 우리를 거쳐간 20여 개의 크고 작은 브랜드들에게 단 한 번도 우리의 기술력과 결과물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받아보지 않은 것으로 제품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왔다. 그동안 만들어왔던 40여 개의 특허와 20건이 넘는 성공적인 기술 이전의 결과도 우리의 ‘믿을 구석’이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생각과 방향을 담을 그릇의 최외곽, 브랜드를 먼저 만들어야 했다. 내용물과 포뮬러는 그에 맞추어 설계하여 넣을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화장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바탕이 되는 것이 ‘물(정제수)’이기도 했지만 우리 화장품은 특히 남설악의 게르마늄 온천수를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제품이라서, 키워드를 ‘물과 온기’로 정했다. 온기를 담은 물 그리고 여기서 새로 시작되는 생명의 힘이라는 주제의 브랜딩을 생각하고 모든 관련된 사람들을 모아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다.
각자 제한 없이 아이디어를 내놓기로 하되 영어와 한글에 한정하지 않고 여러 문화권을 다 검토해 보기로 했다. 한 달 여 동안 고민하여 잡은 여러 시안 중 마지막까지 경합을 한 것은 독일어로 ‘대지’를 뜻하는 [그룬트(GRUND)]와 산스크리트어 기반의 힌디어로 ‘움트는 봄’을 뜻하는 [바하르(BAHAAR)]였다.
많은 난상 토론 끝에 ‘바하르’로 최종 결정을 내렸다. 결론적이긴 하지만 그룬트는 ‘결과’이고 바하르는 ‘원인’이니 좀 더 근본적인 의미를 함축한 바하르에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는 좋은 해석을 하고 싶었지만 브랜드는 선택의 영역이지 평가와 판단의 영역이 아니었기에 부르기 편한 발음의 바하르로 결정하게 되었다. 어찌 되었든 우리의 이름은 ‘바하르’가 되었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오는 인도/중동 느낌의 이국적인 어감, 화장품의 가장 큰 시장인 중국에 대한 고려가 없다는 등의 여러 가지 부정적인 평가가 있었지만 일단 무시하기로 했다. 브랜드는 제품을 사용하는 고객에 대한 설득의 문제이고 그 설득이 자연스럽게 고객에게 먹힌다면 고객의 집단인 시장은 따라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이름이 무엇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의 의미를 이해시키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데 필요한 노력이 브랜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우리 고집(?)의 출발점이기도 한데, 지금 뒤돌아보니 이런 고집이 가장 명확한 우리의 방향성이 아니었을까 한다.
마침내 이름이 결정되자 우리는 단순한 계절을 뜻하는 ‘움트는 봄’ 바하르가 아닌, 진짜 우리만의 바하르를 설명해 줄 의미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수 만년 전, 얼어붙은 대지 위로 지구 깊은 곳에서 온기와 미네랄을 품고 온천수가 땅 위로 올라 흐른다. 따뜻한 온천수는 품었던 온기와 생명의 원천이 되는 미네랄을 내어놓아 마침내 차가운 대지를 녹이고, 지구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다.
우리는 새로 시작되는 생명의 이야기를 풀어내려 신화를 다시 읽어 내려갔다. 이것은 북유럽신화의 얼어붙은 땅 ‘니플헤임/Niflfeim’과 불의 땅 ‘무스펠/Muspell’의 이야기이기도 했고, 그들의 경계에서 만들어지는 최초의 생명 이미르/Ymir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생명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의 소재는 어디에서고 찾을 수 있는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어렵기도 하지만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쉬운 생명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생명이 다시 움트는 지점, 그리고 그 시작이 되는 ‘따뜻함’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우리를 부를 이름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하르에서 연상되는 여러 가지 의미를 떠올려보았다. 생명이 다시 움트는 지점, 그리고 ‘따뜻함’을 만드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나타내줄 단어.
그러다 문득 시간은 한 방향으로 날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절은 봄, 여름, 가을, 겨울을 계속 돌고 도는데 인생은 한번 지나면 다시 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는 사실에서 생각이 멈췄다. 우리는 인생의 봄을 다시 만드는 사람이니 시간을 되돌릴 수 있어야 했다.
다시 봄으로.
B.A.H.A.R. 라는 단어를 거꾸로 읽어보았다. R.A.H.A.B. 시간을 되돌려 다시 봄을 만드는 자. 그렇게 '라헵'이라는 회사명이 만들어졌다. 크로노스/Kronos를 꿈꾸기보다는 동화 같은 작은 마법이 필요했다.
이제 그릇의 이름과 거기에 담길 것을 만드는 사람들의 이름이 결정되었다.
시작이었다.
<3줄 요약>
1. 브랜딩은 선택의 영역이다. 너무 고민하지 말자.
2. 브랜드를 선택했으면 이제는 설득의 문제이다. 설득의 스토리를 만들자.
3. 스토리텔링의 소재가 고갈되면 신화 속으로 뛰어들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