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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스톰 Jun 30. 2023

12,001번이 되기는 싫어!

폭풍의 브랜드 도전기 Ep. #05 차별화의 함정

2022년 6월


이름이 생겼으니 이제 제품을 만들어야 했다.

알고 지내던 친한 브랜드 매니저, 화장품 마케터들을 모두 불러 그들의 의견을 들었다.


그들은 말했다.





시장조사가 먼저에요, 대표님!



그러나  생각은 조금 달랐다.

2022년 현재까지 한국 화장품 시장에 나온 브랜드는 12,000개가 조금 넘었다. 올리브영과 같은 드럭스토어에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화장품들을 생각해 보았다. 모든 브랜드 어떠한 방식으로든 ‘시장조사’라는 절차를 거쳤고 그 리포트가 제시한 마켓의 트렌드를 쫓아 제품을 만들어왔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훈련병처럼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그 줄에 끼어 정신없이 달리는 '훈련병 12,001번'이 되고 싶지 않았다.


‘차별화’달라지는 꿈을 꾸는 자의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몸부림이다. 시스템 내에서 안주하는 인생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의 것이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화장품에 대한 인식을 나 스스로도 바꾸지 않는다음에도 똑같은 제품이 나올 것이 분명했다. 지난 10여 년간 화장품을 만들고 기획하면서 무엇이 피부에 가장 좋은지, 무엇이 가장 안전한 지는 우리가 제일 잘 알고 있지 않았던가?



마이 웨이, 또 고집이었다.

시장조사는 그렇게 생략되었다.





화장품의 포뮬러는 물/Distilled water과 베이스/Base 원료 그리고 효능/Active 원료 이렇게 크게 3개의 영역으로 나뉜다. 물은 남설악의 게르마늄 온천수를 쓰기로 했으니 '진정'이라는 효능의 면에서 차별화 포인트는 이미 충분했다. 결국은 베이스와 효능의 차별화가 관건이었다.



화장품 베이스 제형 다 거기서 거기 아냐?


라고 하지만 가장 기본이 되는 보습 성분 [글리세린]만 해도 모든 화장품의 전성분 표시에 ‘글리세린’이라고 똑같이 표시되기는 하나, 순도 낮은 저개발국(?)의 제품부터 유럽계 다국적기업의 고순도 제품까지 품질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 난다.


내가 산 화장품에 어떤 수준의 글리세린이 쓰였는지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들은 에서 규정한 전성분공개 지시에 충실했으니 의를 다했고, 품질의 고저를 안 알리는 것이 불법은 아니었다. 화장품 한 병에는 이런 눈 가린 베이스 원료가 20여가지가 들어간다. 내 눈에만 보이는 이 지점이 차화의 시작이었다.






기준을 객관화할 필요가 있었다.


원산지부터 원물 수확, 가공, 제조에 이르는 생산 전반의 체크 리스트와 전 세계의 로컬 및 환경규제 리스트, 그리고 기술적 진보를 보여주는 SCI급 논문, 특허, 안전성 테스트 결과를 모두 취합하여 우리만의 원료 Quality Index를 만들어 보았다.




효능, 기술, 환경/규제, 지속가능성 그리고 안전성



이 5가지 영역에서 중복되는 항목을 제외하고 나니 우리가 검토해야 할 원료 하나의 체크 리스트282개로 추려졌다. 식약처, FDA, EWG, 에코서트...... 세상이 요구하는 기준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었다.


적어도 이것만은 지켜달라고 국가와 이름 모를 단체가 규정했다는 이유로 그저 기계적으로 지켜왔던 기준과


우리가 우리의 소신을 지키고 싶어 끝까지 붙들고 밀어붙인 기준은 그 시작과 끝, 그리고 수준이 다르다.





인덱스가 확정되자 검토는 베이스부터 시작했다.

우리만의 잣대를 원료 리스트에 들이대니 살아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우리 인덱스로 10점 만점에 9점대가 넘는 것들로 조건을 좁히니 유럽과 미국계 다국적기업의 원료만 남았다. 선택의 과정은 명료했다. 기준을 지키는 것. 그러나 처음부터 문제가 발생했다. 가격이었다.


베이스 원료 가격만 대략 5배가 비싸졌다.

12,001번이 될 수 없으니 길은 하나였다.

눈동자가 흔들렸다. 진짜 흔들렸다.



이제 효능 원료의 차례였다. 보습, 미백, 진정, 항산화 그리고 안티에이징의 영역에서 우리가 아는 가장 안전하고 효과 있는 성분을 중심으로 논문과 특허를 보유하고 있으며, 지난 3년간의 화장품 컨퍼런스/학회에서 수상경력이 있는 원료들로만 추려 검토했다. 우리 눈에 탐색되는 최대치였다.


각 제품에 3가지 이상의 원료를 이런 기준으로 선정했는데 이들 모두는 ‘컨셉’이 아니라 ‘효능’ 원료였다. 그 말인 즉, 그 원료가 자신의 효능을 충분히 발휘할 만큼 논문, 임상에서 인증된 용량(recommended dosage)을 넣는다는 의미였다. 경제성은 이미 포기한 상태였다. 이러면 기준 원가의 몇 배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결정하기 힘들었지만 이걸 포기하면 우리는 그렇게도 싫어하던 'One of them'이 될 것이다.

나의 동료들, 그리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모두 말렸다. 나도 흔들렸다. 많이.

 


그러나. 오히려 더 자신이 없었다.

적당히 타협해서는 그들과 싸울 자신이 없었다.

난 12,001번이 아니니까. 


지난 10년간 '단가'를 이유로 고객사에서 리젝트 되었던 우리의 제안서들이 떠올랐다.


가자... 그대로... 아무것도 바꾸지 말고.  





우리가 완성한 포뮬러를 보고 OEM_K사의 연구원은 이렇게 말했다.



‘이거 진짜 하실 건가요?’



그들은 진심 나를 걱정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화장품 포뮬러의 단가가 일반 화장품보다 몇'%' 높은 것이 아니라 몇'배'가 높았기 때문이다. 제품이 나오기까지 K연구원들한테 이 말을 한 5번쯤 들었던 것 같다.


결국 그들의 진심 어린 충고에도 불구하고 우리 제품은 그대로 나오고야 말았다.


팔아야 하는 우리의 걱정이 시작되었다.





<3줄 요약>
1. 진정한 차별화는 부가가치의 크기를 달리하는 것이다.
2. 우리에게 주어진 규제와 조건은 우리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것이다. 그것을 따른다고 최고와 최선은 아니라는 말씀.
3. 차별화의 함정: 어려운 길은 나만 안 가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도 안 가는 길이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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