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6] 와인에 취하다

by 작가의 방

2023. 10. 10. (화)

날씨 : 맑음, 더움

출발 : Puente La Reina

도착 : Ayegui

거리 : 23.8Km

숙소 : San Cipriano Hostel

비용 : 34유로(47,600원)

숙소 15

식사 12

간식 7


어제밤에도 코고는 사람은 없었다. 이럴리가 없는데 신기하다. 다른 사람들도 몸이 길에 적응을 하고 있나보다. 내가 피곤해서 남들보다 먼저 잠이 들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잘 자고 아침에 길을 나섰다. 인적도 없는 새벽길, 하늘에 별이 쏟아진다. 깜깜한 어둠에 길 위의 풍경까지 지워지니 정말 이 세상에 나혼자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오늘 길은 거의 평탄했다. 아름다운 시골길이었다. 오기 전 사진에서 많이 보던 전형적인 길이었다. 계속 아무생각 없이 걸었다. 단조로운 것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느껴졌다. 나중에 이 길이 그리워진다면 분명히 이 단조로움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간에 내 앞에 가고 있던 한 한국인 아주머니가 길을 잘못 드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뒤에서 그쪽이 길이 아니라고 말해줬더니, 아주머니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냉냉한 표정으로 다시 휙하고 앞서 가버렸다. 기분이 조금 나빴다. 생각해보면 내가 뭘 바라고 도움을 준 것도 아닌데, 뭐 기분나쁠 것까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한국에서 살면서 항상 댓가를 위해 뭔가를 했고, 그래서인지 선의를 베풀 때조차도 나도 모르게 뭔가를 바래왔었던 것 같다. 그래서 이젠 작은 선의를 베푸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됐나보다.

오늘 처음 앱에서 추천해주는 코스보다 한 마을을 더 갔다. 아예기(Ayegui) 근처에 무료 와인 분수가 있는데, 꼭 한번 가보고 싶었다. 그런데 분수 운영시간이 정해져 있어서 아침 일찍 지나가다가는 문이 닫혀 맛도 볼 수가 없다고 한다. 오늘 조금 무리해서 한 마을 더 가서 숙소에 짐을 풀고 샤워만 마치고 쫄래쫄래 분수를 찾았다. 말처럼 분수는 아니다. 벽에 수도꼭지가 달려있고, 수도꼭지를 열면 와인이 콸콸콸 나왔다. 신기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친 순례자들을 위해 와인 한 모금 베푼다’라는 컨셉트가 너무 신박하다. 사람 한 명 안 지나가는 와인 분수 앞에서 나혼자 가지고 간 물통으로 두 통을 먹었다.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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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새벽 안개가 짙게 깔린 아침 순례길. (아래 왼쪽) 마을과 마을 사이에 푸드트럭이나 이런 간이 상점이 있다. 주인이 없는 곳은 도네이션으로 운영된다. (아래 오른쪽) 내가 사랑한 와인 분수. 실제로 와인 수도꼭지다. 하나는 물, 하나는 와인이 나오고 안내표지판에 와인 분수의 취지가 스페인어로 설명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