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12] 마침내 우기

by 작가의 방

2023. 10. 16. (월)

날씨 : 흐림, 드디어 비

출발 : Belorado

도착 : Ages

거리 : 27.6Km

시간 : 0600 → 1400

숙소 : Al Pajar Ages Hostel

비용 : 62유로(86,800원)

간식 6

와인 11

숙소 14

저녁 31


오늘도 거리상으로는 꽤 되지만, 이젠 거리 때문에 쫄지 않는다. 그래도 조금 일찍 서둘러 나왔다. 날이 잔뜩 흐렸고, 분명히 비도 올 것 같았다. 어젯밤에 비가 왔었는지 이미 땅이 질었다. 처음 겪는 또 다른 순례길의 어려움이었다. 마을을 벗어나자마자 숲이 나왔다. 잔뜩 흐린 날의 새벽 숲은 마치 악마의 숲 속 같은 스릴을 주었다. 숲에서 난생처음 듣는 소리가 났고, 숲은 무서운 그림자를 수시로 만들었다. 냄새마저 무서웠다. 소리, 모양, 냄새가 어우러져 기괴한 느낌이었다.


몸과 마음이 길에 적응이 되니 이젠 슬슬 생각이 과거로, 미래로 간다. 순례길에 오른 이후 오늘 처음으로 미래에 대한 상상을 해본 것 같다. 오후부터는 비가 왔다. 옷은 젖고, 바람에 추웠다. 아무래도 맑은 날보다 어려웠다. 하지만 항상 맑은 날일 수만도 없고, 비가 온다 한들 못 갈 길도 아니다. 비를 맞으며 걸었지만 행복할 수 있었다. 왜 비가 오면 불행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싶을 정도였다.


비를 맞을 때의 고통을 과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돈이 없는 고통을 너무 과장하는 경향이 있지 않은가 싶다. 비가 오면 비가 오는 대로 걷듯이, 돈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살면 될 텐데, 마치 죽을 것처럼 겁을 먹고 산다. 그래서 더 돈의 노예가 된다. 돈이 없으면 고통스럽겠지…. 하지만 돈이 없어도 웃을 수 있을 것이다. 고통에 대한 과장인 것 같다.


오늘까지는 어쩌다 보니 앱에서 알려준 대로,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본 대로, 추천에 따라 움직였다. 남들이 좋다는 것, 맛있다는 것, 멋있다는 것을 찾았다. 솔직히 80%는 별로였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을 내 상황이 불확실할수록 잊게 된다. 나는 내 관점대로, 내 취향대로 살면 된다. 내일부터 그동안 같은 속도로 걷던 순례길 친구들과 헤어져보려고 한다. 나만의 취향과 속도로 추천 경로를 이탈해서 무쏘의 뿔처럼 가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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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왼쪽) 새벽길 길섶에서 괴생명체가 튀어나와 나를 공격했다. 아주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었다. (위 오른쪽) 내리는 비도 힘들지만, 내린 비가 길을 어렵게 만든다. 신발이 흙탕물에 빠지고, 무거운 진흙이 신발에 붙는다. (아래) 순례길에서 최고로 맛있었던 치킨 빠에야. 해물 빠에야만 있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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