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0. 20. (금)
날씨 : 흐림, 강풍
출발 : Boadilla del Camino
도착 : Carrion de los Condes
거리 : 24Km
시간 : 0915 → 1515
숙소 : Centro del Espiritu Santo Pilgrims hostel
비용 : 29.5유로(41,300원)
아침 3.5
간식 5
점심 11
숙소 10
어제는 판단 미스였다. 오랫만에 호텔 방에서 호젓하게 자겠거니 하고, 또 싸게 호텔방을 이용하니까, 방을 함께 썼다가, 잠을 거의 못 잤다. 한 방에 어설프게 서로 아는 사람과 둘이 자는 게, 모르는 사람 여러 명과 대형 알베르게에서 자는 것보다 더 신경쓰였다. 아니나 다를까 내 룸메이트는 엄청나게 코를 골아주시고 밤새 기침까지 하시는 통에 나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동안 가성비를 따지며 공짜라면(싸다면) 무조건 좋아라했던 내가 어리석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가성비가 나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공짜나 싼 것만 쫓다가 더 중요한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늦게 일어났다. 오늘 목적지는 좋은 숙소가 충분히 많은 곳이라 천천히 출발했다.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바람은 어제보다 더 쎘던 것 같다. 이 바람이 좀 신기한 게, 한쪽으로만 불고, 단 1초도 쉬지 않고 분다. 바람이 무섭다는 것을 오늘 또 느꼈다. 마치 공업용 강풍기를 한쪽으로만 8시간 쐬게 하는 것과 같았다. 고문도 가능할 것 같다. 계속 바람을 맞다보면 정신이 멍하다.
그러다 정말 아주 가끔 바람이 뚝 멈추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오묘한 느낌이 든다. 윈도XP 바탕화면 같은 풍경이 8시간 동안 변함없이 펼쳐지는데, 바람이 멎는 순간 아무런 소리도, 어떠한 움직임도 없다.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아니 시간이라는 게 존재하는가? 시간이 도대체 뭔가?하는 생각까지 하게된다. 매일 매일 시간이라는 감옥 속에 갇혀 살면서, 생산성이나 시간활용을 쫒으며 아등바등 댔다. 그런데 정작 시간에 대해서 본질적인 질문을 해본 적은 없었다. 나 혼자 걷는 이 길에서 아무도 없고, 시간도 없다니…. 자유를 느꼈다.
숙소에 도착해서 혼자 저녁을 먹으러 갔다. 찾아간 식당은 심지어 7시 30분에 저녁 식사를 시작한다고 했다. 1시간 반이나 더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하고 있었는데, 나보다 먼저 와 있던 케냐에서 온 부부 역시 마찬가지 상황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식사가 가능할 때까지 와인을 먹으며 기다리로 했다. 말이 참 잘 통하는 친구들이었다. 그렇게 즐겁게 먹고 마시니 9시 30분이었다. 내가 묵는 알베르게 통금시간이었다. 아쉽지만 인사를 하고 계산을 하려고 했는데, 이미 케냐 부부가 내 것까지 계산을 마친 상황이었다. 기분이 좀 묘했다. 트레킹을 좋아하는 케냐 부부에게 한국 올레길에 꼭 오라고, 같이 걷자고 얘기하며 멋적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16일차가 되니 걷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많이 없어졌다. 다리도 생각보다 아프지 않다. 물론 다 걷고 나면 힘들고 곳곳에서 통증도 느껴지지만 견딜만 하다. 우리의 몸은, 마음은 적응을 엄청 잘한다. 그러니 새로운 것들 앞에서 너무 두려워하거나 기죽지 말자.
(위) 길을 걷다 순간 컴퓨터 앞인 줄 알았다. 뜬금없는 윈도 바탕화면이 하루 종일 펼쳐진다. (아래 왼쪽) 왠지 자꾸만 생각나는 글귀. (아래 오른쪽) 추워서 시킨 국물 요리인데 우리나라 내장탕처럼 부속 고기들이 들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