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y 26] 길 위의 심리상담

by 작가의 방

2023. 10. 30. (월)

날씨 : 오전 흐림, 오후 비

출발 : Villafranca del Bierzo

도착 : O Cebreiro

거리 : 29Km

시간 : 0730 → 1600

숙소 : Casa Campelo

비용 : 42.5유로(59,500원)

점심 9.5

숙소 13

저녁 20


어제 숙소는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카드결재가 안 되는 것 빼면. 완전 한국식으로 필요한 것들 다 있고, 모든 것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보니 내 왼쪽 자리의 순례자는 코를 심하게 골았고, 내 오른쪽에는 호흡기 쪽에 장애가 있는 순례자가 있었다. 고로 잠은 잘 자지 못했다.

어제 사실 기분이 많이 안 좋았다. 어머니 때문에, 또 몇 가지 한국의 현실 문제 때문에. 그래서 술을 과하게 마셨는지 오늘 아침에 일어나니 머리가 좀 무겁고 안 좋았다. 오늘은 꽤 많이 걸어야 하는 날이라서 신경이 좀 쓰였다.

두통 덕분에 오늘은 ‘부분과 전체’가 화두가 됐다. 신체의 일부분이 괴로운 두통 때문에 오늘 하루의 순례길 전체가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통은 내 상태 중 일부일 뿐인데, 내가 너무 과민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이 다 최상의 상태여야만 한다는 완벽주의가 아닌가 싶다. 사실 머리 좀 아파도 할 것 다 한다. 머리 아프다고 오늘 하루를 망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두통 덕분에 내 마음 깊숙히 숨겨져 있던 완벽주의를 직시하게 됐다. 완벽해야만 한다는 강박이 작은 부분의 문제도 과대평가하게 만들고 근거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일예로 나는 장애인 복지에 관심이 많은데, 그것도 어찌보면 그들은 장애가 있으니 완벽하지 않고, 그래서 그들의 인생도 불행할 것이라는 나의 비합리적인 선입견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부분이 모여 전체를 이루지만, 부분이 곧 전체는 아니다.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는 말이 있지만, 지나친 편견일 수 있다. 오늘은 마치 순례길을 걸으며 심리상담 받은 것처럼 내 마음속을 깊숙이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다.

오늘 걸은 구간은 생각보다 힘들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마을이 산 꼭대기에 있었다. 긴 오르막을 비바람 속에서 오랜 시간 걸어야 했고, 오랫만에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이럴 거면 메세타가 그립다. 거긴 최소한 오르막 내리막은 없으니까.

걷다보니 이정표 모양이 또 조금 바뀌었다. 갈리시아(Galicia) 지방으로 들어왔다. 즉, 나의 인생 첫 순례길도 종반부를 맞이한다는 것이다. 아쉽고, 이제까지와의 느낌과는 또 다른 감정과 생각이 훅하고 밀려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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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갈리시아 지방에 들어왔다는 것을 알리는 이정표들. (오른쪽) 갈리시아 입성을 자축하는 갈리시아 대표 요리 뽈보. 한국의 문어 숙회가 그리워지는 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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