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근시가 아니라서 멀리 있는 것은 보이는 편이라 평소에는 안경을 쓰지 않는다. 그러다가 무엇을 읽거나 쓰게 되면 돋보기안경을 꺼내어 써야 하는데, 어떤 때는 번거롭고 귀찮아서 대충 뜻을 짐작하거나 자세히 보는 것을 포기하기도 한다.
이럴 때 나의 뇌에 이미지가 뿌옇게 맺히고 세상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짜증이 나기도 한다.
젊을 때부터 어떤 것에 한계를 느낄 때, 눈이 잘 안 보이는 꿈을 자주 꾸었었다.
꿈의 내용은 “대학 시절 늘 가던 학교 도서관 계단을 오르는데, 시야가 좁아지며 바로 앞 계단만 간신히 보이고 주변이 안 보여서 진땀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때 내가 공부를좁게하느라 삶의 전체 그림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경고를 무의식이 반복해서 전달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돋보기를 써도 예전처럼 글이 잘 보이지 않을 때가 안경의 도수를 올려야 할 시기이다.
안경점에 달려가서 다시 돋보기를 맞추어 쓰니 또렷하게 글씨가 보인다. 글씨가 잘 보이니 의미도 잘 이해되는 것 같은 착각이 들며 선명한 세상이 펼쳐진다.
한편으로는 돋보기를 쓰고 거울을 보니 안 보이던 주름이 눈에 확 들어온다. 희미한 거울 속 내 모습은 그럭저럭 봐줄만했는데 진실은 그게 아니었다. 하하.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의 감각이 무디어지는 것을 좋은 의미로 해석하기도 한다. 젊은 시절에는 날카로운 비판의 감각이 필요하지만 나이가 들어 뾰족하게 구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는 것이다. 노년은 작은 것에 연연하지말고 큰 그림을 보아야할 시기이다.
어릴 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의 경계가 뚜렷했었다. 경계는 선명한 선이었다. 눈이 노화하니 경계가 스펙트럼이 되었다. 이것과 저것의 구별이 쉽지 않게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인물과 배경이 정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 경계를 모호하게 하는 그만의 기법, ‘스푸마토’이다. 이 기법이 멀리서 보면 자연스럽게 인물과 배경을 분리되게 한다.
그의 그림은 2차원 만화에서처럼 모든 것이 선으로 확실하게 분리되는 것만이 진실에 가깝지는 않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렇게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 우리 편과 남의 편을 정확히 편 가르기 하는 것은 쉽지 않다. 회색지대가 두껍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같이 과학이 발달한 시대에, 나는 가능하면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으려 한다.
돋보기도 쓰고, 나중에는 보청기도 착용해서 정확한 의미를 이해하려 한다. 책의 의미도 정확히 파악하고 대화도 제대로 듣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싶다. 둔화된 감각으로는 듣고 싶은 것과 보고 싶은 것만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편, 나이가 주는 제한도 받아들이려 한다.
두꺼운 경계와 모호한 회색지대를 인정하려고 한다. 멀리서 바라보는 것이 진실에 더 가까울 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려고 한다.
가까이에서 보면 무슨 그림인지 모르는 인상파나 점묘파의 그림을 멀리서 보아야 잘 보이는 것처럼, 한 발짝 떨어져서 인생의 전체 의미를 파악하는 것도 노년의 특권이 아닐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