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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병옥 Nov 04. 2024

영화<파벨만스>-인생을 편집하다

어떤 구슬을 꿰어 목걸이를 만들까

    

모든 예술에는 자기 고백이 들어있다.

어떤 형태의 작품이건 예술은 자신의 방식으로 그것을 보여주는 행위다.

거기에 작품이 자전적인 내용이 소재가 될 경우 정도는 더 심해진다. 마치 벌거벗고 많은 사람들 앞에 서 있는 모양새가 된다.

스필버그는 이런 것을 무릅쓰고 나이가 들어서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었다.

가족에게 상처가 될까 봐 그들이 죽은 후에 만들었다는 이 영화는, 그의 인생과 예술에 대한 철학을 감동적으로 보여준다.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새미는 천재 컴퓨터 엔지니어인 아빠와, 콘서트 피아니스트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났다. 사고형 인간과 감정형 인간의 극단적인 전형이었던 부모의 영향을 다 받으며 자랐다.

그가 어릴 적 인생의 첫 영화를 극장에서 보고 놀랐을 때도 아빠는 스크린 속의 인물이 거인이라서 큰 것이 아니라 영사기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스크린이 있어서 그럴 뿐이라는 과학적인 설명을 한 반면, 엄마는 영화는 잊히지 않는 좋은 꿈이라고 말해준다.

영화 속 기차가 자동차와 충돌하는 장면을 인상적으로 본 새미에게 아빠는 전동 기관차가 달린 기차와 레일을 사주고, 새미는 영화 장면에서처럼 기차를 작동시키고 장난감 자동차와 충돌시킨다. 비싼 기관차를 고장 내면 안 된다는 아빠와는 달리, 엄마는 아들이 그 장면을 반복해서 보며 공포를 통제하고 싶어 한다는 마음속 소망을 읽어내고 캠코더로 그것을 촬영하게 해 준다. 새미가 찍은 이 최초의 영화는 옷방 안에서 상영되고 엄마와 단둘이 보게 된다. 이후로 새미는 동생들과 친구들을 출연시키는 작은 영화들을 많이 만든다.

아빠가 큰 회사의 스카우트를 받아 이사가게 되었을 때 그의 조수이며 그의 가족과 허물없이 친하게 지내던 대니 아저씨도 함께 피닉스로 옮겨가게 된다. 대니는 아빠처럼 똑똑하지는 않지만 공감 능력이 뛰어나고 파티 때 늘 가족들을 웃게 하는 사람이었다. 아빠가 하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말을 쉽게 풀어서 엄마에게 설명하고 엄마의 감정을 이해하는 대니를 엄마는 많이 의지한다.


어느 날 가족들과 대니는 캠핑을 하고 즐거운 시간을 갖는다. 이후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힘들어하는 엄마를 위로하기 위해 아빠는 새미에게 필름 편집기를 선물하며 캠핑 때 찍은 필름을 작은 영화로 만들어달라고 부탁한다. 필름을 자르고 이어 붙이며 영상을 자세히 들여다보던 새미는, 엄마와 대니 아저씨 사이에 흐르는 묘한 기류와 스킨십을 발견한다. 실제에서는 느끼지 못했던 내용을 필름을 들여다보면서 찾아낸 것이다. 새미는 놀라고 상처를 받았지만 그런 부분은 다 잘라내고 무난한 부분만 이어서 만든 영화를 가족들이 모인 거실에서 상영하고, 가족들과 대니는 환호한다. 감동하며 고마워하는 엄마에게 그는 냉정하게 대하고 무례하게 군다. 폭발한 엄마가 이유를 묻자 그는 엄마를 옷방에 데려와서 잘라낸 필름 부분을 엄마에게 보여준다. 자신도 인정할 수 없었던 감정을 확인한 엄마가 새미에게 사과하며 오열한다. 아빠는 좋은 사람이라며 앞으로는 자식들을 위한 엄마로 살겠다고 다짐한다.


유태인이면서 체구가 작았던 새미는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체구도 크고 운동도 잘하는 친구가 있는 무리에서 그를 믿고 새미를 괴롭히는 친구까지 있는 상황에서 폭력을 당하기도 하고 학교생활이 쉽지 않다. 가족 캠핑 영화를 만든 이후 영화에 대해 회의가 생겨 영화 만들기도 중단했었는데, 여자친구가 새미에게 고등학교 졸업 파티에서 상영할 ‘땡땡이의 날 1964’를 만들어보라고 한다. 그는 해변에서의 친구들의 즐거운 활동들을 약간의 연출을 섞어 촬영한다. 이것을 편집할 때 자신을 괴롭혔던 일진을 멋지게 보이도록 편집을 해서 그를 영웅으로 보이게 만든다. 영화가 끝난 후 그가 불량해서 사귀기를 꺼리던 학교의 퀸카가 감동하며 그에게 다가가서 전교생 앞에서 그에게 키스한다. 그는 새미에게 찾아와 그를 괴롭힌 자신을 왜 멋지게 만들었냐며 그 모습은 실제의 자기가 아니라고 말하며 울먹인다. 새미는 인생은 영화와 다르다며 그에게 “실제의 너는 반유대주의 쓰레기야.”라고 소리친다.

     

새미의 가족은 대니를 남기고 새 회사가 있는 캘리포니아로 이사하지만 엄마는 우울해하며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있고 자신을 즐겁게 할 누군가가 필요하다며 원숭이를 집안에서 키우기도 한다. 결국 엄마는 자신에게는 대니가 필요하다며 이혼을 결정한다. 그녀는 삶은 자신의 것이라며 가슴이 시키는 대로 살겠다고 한다. 새미는 가슴이 찢어지고, 엄마는 세상에서 가장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가족은 찢어져서 여동생 셋과 엄마는 대니가 있는 피닉스로 가고, 아빠와 새미는 캘리포니아에서 살게 된다.

아빠는 영화 만드는 것이 꿈인 새미에게 현실적인 일을 하라고 계속 말했지만 새미가 대학에 적응하지 못하자 아들이 하고 싶은 일을 진작에 하도록 허락했어야 한다고 후회하며 그를 지지해 준다.

영화 제작소에 면접을 보러 온 새미는 그가 존경하던 존 포드 감독을 만나서 “중요한 것은 지평선을 화면의 어디에 두고 찍어야 하는가이다.”라는 말을 듣고 신이 나서 촬영 스튜디오를 걸어 나간다.     

    



보통 감독이 자전적인 영화를 만들 때 허구를 섞기도 하지만 스필버그는 이 영화에서 지나칠 정도로 솔직했다. 이름만 다를 뿐 자신인, 주인공 새미를 빌려 그때의 기억을 고스란히 전한다. 영화에서도 가장 큰 에피소드인 부모의 이혼은 그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어릴 때 엄마에게 받은 배신감과 충격은 나중에 스필버그에게 자식을 갖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하게 한다. 자식에게 부모가 갈라선다는 것은 전체 세계가 무너지는 것이어서, 자식에게 상처를 줄 거라면 차라리 낳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까지 하게 한다. 그때 그가 엄마에게 가진 감정은 그녀가 너무 이기적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면서 느낀 것은 영화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는 예술이고, 엄마의 예술적인 유전자를 받지 않았다면 그가 위대한 감독으로 태어나지 못했을 거라는 점이다. 그의 엄마는 예민한 감성을 가지고 있고 훌륭한 피아니스트였지만 결혼과 육아로 자신의 커리어를 접었고, 착하고 아내를 배려하지만 그녀의 세계를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과 괴리를 느끼며 살았다. 남편의 친구인 대니는 양쪽 세계를 다 이해하고 두 세계를 통역할 수 있는 존재로 그들의 가족과 너무 친하게 지내다가 어느 시점부터 선을 넘게 된 것이다.

물론 아빠의 유전자도 그의 영화작업에 좋은 영향을 주었다. 영화는 상상을 현실화하는 작업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이해가 없으면 생생한 효과를 주는 방법을 적용하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부모의 좋은 점을 다 받아서 스필버그가 최고의 영화감독이 된 것이다.

영화는 스필버그가 대학을 그만두고 영화사업에 발을 디디는 시작 부분에서 끝난다. 관객은 이미 그가 얼마나 훌륭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는지 알고 있다. 그 젊은이는 그 후로 승승장구하며 최고의 감독이 되었다.


그러나 그가 이 영화를 만든 이유는 자신이 어릴 때 얼마나 재주가 있었는지, 좋은 새싹이었는지를 말하려고 만든 것은 아니다. 살아있는 부모가 상처받을까 봐 이야기를 마음속에 숨겨두었다가 결국 그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 것은, 어릴 때 미워했던 엄마를 영화라는 예술의 형태 안에서 어떻게든 이해하고 용서하고 화해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만일 더 젊었을 때 이것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엄마를 훨씬 더 나쁘게 묘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필버그가 나이 들어 만든 이 영화 속 의 엄마는 연민의 대상일지언정 방탕하고 나쁜 여자로 나오지는 않는다. 심지어 그는 엄마도 똑똑한 아빠 옆에서 힘들었을 거라고 변명해주기도 한다.

    

스필버그가 고등학교 시절 만들었던 영화에서 기록 필름을 편집하여 질나쁜 친구를 영웅으로 만든 것은 어린 마음에 그 친구에게 복수하려는 나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요즘도 많은 사진 중 자신의 의도에 맞는 것을 짜깁기해서 전혀 다른 맥락을 만드는 나쁜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들고 시간이 흐르면 중요하게 생각되는 것들이 달라진다. 여러 자료들과 기억 중 어떤 것을 취사선택할 것인지는 창작자의 의도에 달려있다. 어떤 방향으로 이야기를 만들지에 따라 기억은 편집된다.(없는 것을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날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존 포드 감독이 말하는 ‘지평선의 위치’는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 똑같이 주어진 사실을 어떤 각도로 보는지에 따라 영화가 재미있을 수도, 별로일 수도 있다는 메타포이다.

심지어 다큐멘터리도 모든 것을 다 똑같이 중요하게 다룰 수는 없다. 어떤 각도로 어떤 부분을 강조하는가가 감독의 개성이다.

다채로운 수많은 구슬이 떨어져 있는 기억의 바닥에서 어떤 구슬들을 주워, 어떤 순서대로 꿰어서 목걸이를 만들지는 작가의 자유다.

스필버그는 부모를 사랑하고, 한때는 미워하고, 결국은 용서하며 나중에 자신도 자식을 낳아 키운다. 누구도 완전한 인간은 아니지만 자식들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면 부모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인생은 지루한 다큐멘터리 필름이고 일어날 일은 결국 일어나지만, 나중에 거기서 무엇을 건져 올릴지는 순전히 각자의 영역이다.

나이가 든 지금, 내 인생에서 어떤 큰 흐름이 있었고, 어떤 부분을 살려서 여러 번 보고 싶은 가를 숙고해서 나의 인생도 편집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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