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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천일영화

영화<프랑켄슈타인>-미숙한 아버지 이야기

상처투성이 아들, 괴물 아버지를 용서하다

by 윤병옥

기예르모 델토르 감독을 좋아한다.

<판의 미로>를 필두로 하여 <셰이프 오브 워터>, <피노키오>까지 리뷰를 썼다.

그의 영화에는 항상 형상이 기괴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신화에서 모티브를 딴 요정 판, 전설 속 양서류 생물, 동화에 나오는 나무 목각 인형, 시체로 만든 피조물까지 세상과 의식 세계에서 거부하는 존재들을 묘사한다. 평범하지 않을 뿐, 영화를 다 보면 그들은 순수하고 아름다운 존재들이다. 그리고 괴물은 항상 인간이다.

이번 영화는 그의 많은 영화 중 <피노키오>과 맥을 같이 한다. 그가 그린 피노키오는 단순한 디즈니 피노키오와는 달리 세상에서 자식을 키우는 아버지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엄친아의 기준을 정해놓고 그대로 하라고 강요하는 아버지, 능력이 없으면 미워하는 아버지, 명예를 드높이는 영웅이 되라고 부추기는 아버지를 보여주며 미숙한 아버지가 성숙해 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번 영화 <프랑켄슈타인>도 역시 미숙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원작 소설을 만든 메리 셸리가 의도한 그대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소설을 영화로 만들 때 감독은 그것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해석할 자유가 있고 그것이 받아들일지 결정하는 것은 관객의 몫이다. 나는 감독의 해석이 마음에 든다.(그러니까 리뷰를 쓴다.)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은 액자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북극 탐험선을 탄 선장이 얼음에 배가 갇히자 근처를 수색하다가 다친 남자를 구조하고 그의 이야기를 듣고, 뒤이어 나타난 괴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사라진 후 고향에 돌아와 그가 들은 이야기를 알리는 방식이다. 이런 구조는 마치 이 이야기가 실화라는 느낌을 주고 관객은 같은 이야기를 두 사람의 시각으로 보면서 판단할 수 있다.

먼저 부유한 귀족이자 의사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이 자기의 생을 이야기한다.

그는 어릴 때 사랑하는 엄마를 잃고, 고지식하고 능력 있는 의사였던 아버지에게 회초리를 맞으며 교육받는다. 죽음이 엄마를 빼앗아간 것에 절망하며 자신이 무정한 아버지를 뛰어넘고 생을 창조하는 창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다. 전장을 누비며 시체를 수집하고 그중 멀쩡한 부분을 모아 신체를 만들고 거기에 강한 전압을 걸어 기관이 다시 작동하게 만든다. 이 작업을 후원한 동생의 약혼자에게 마음을 빼앗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겉모습은 흉측하지만 마음이 순수한 괴생명체에게 마음을 주며 사랑하게 된다.

빅터는 처음에는 자신이 만든 생명체에게 경이감을 느끼고 그를 가르치지만 그가 발전하는 속도가 더디자 참을 수 없게 되고, 자기가 사랑하는 여인까지 그에게 마음을 주자 분노하며 그가 있는 성에 불을 질러 피조물을 죽이려 한다. 그러나 그는 죽지 않는 존재였고 다시 살아나 창조주인 자신을 쫓아와 마지막 은혜로 자신의 동반자를 만들어달라고 애원한다. 그 제의를 거절하자 괴물은 날뛰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동생과 약혼자가 죽게 된다. 프랑켄슈타인과 괴물은 서로를 증오하며 싸우게 된다.

이번엔 피조물의 입장에서 하는 이야기이다.

괴물이 처음 배운 단어는 창조자의 이름 ‘빅터’였다. 그만큼 그는 괴물의 모든 것이었고 세상 전부였다. 그러나 여러 교육을 그의 속도대로 따라가지 못하자 빅터는 그를 짐승이라고 부르며 학대한다. 쇠사슬로 묶어놓고 쇠막대기로 그를 때린다. 엘리자베스가 괴물의 눈에 들어있는 고통이 그가 지성을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말해준다며 그에게 연민과 사랑을 느끼자 빅터는 자신을 죽이려고 성에 불을 지른다. 간신히 탈출한 괴물은 숲 속을 헤매다가 오두막을 발견하고 창고에 숨어서 그 집에 사는 가족을 훔쳐보면서 사랑이 무엇인가를 배운다. 그곳의 눈먼 할아버지를 통해 글을 배워서 책도 읽을 수 있게 되고 그와 친구가 된다. 그러나 거기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정체가 발각되어 떠나게 되자 자기는 누구인지 의문을 품고 창조자를 찾아가게 된다. 죽을 수도 없는 영원한 고독을 견딜 수 없으니 동반자를 만들어달라는 그의 부탁을 빅터가 거절하자 분노하여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죽인다. 서로를 죽이려는 과정의 끝 무렵에 북극에까지 다다른 것이다.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삶이 마지막에 이르렀을 때 그는 괴물을 ‘아들’이라고 부르며 사과하고 용서를 구한다. 맹인 노인이 그랬듯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스스로를 용서하고 자신의 존재를 받아들이고 그저 살아가라고 말한다. 또한 자기의 이름은 아버지가 준 것이지만 아들이 불러주어야 의미가 있다며 마지막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달라고 부탁한다.

괴물은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며 그를 용서한다.

마침내 둘은 괴물에서 인간이 된다.


기예르모 델토르 영화에서 진정한 괴물은 겉모습이 흉측한 존재가 아니라, 항상 여성성이 부족하고 욕망만 가득한 인간들이었다. 여성성인 ‘아니마’는 언제나 순수하고 영혼을 가진 존재를 선택한다.

이 영화에서도 사람들은 겉모습이 끔찍한 존재를 괴물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괴물은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그의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마음에는 다정함이라고 눈곱만큼도 없고 자신을 신과 겨루는 오만함만이 들어있다. 이것은 어쩌면 대물림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빅터가 만일 아버지에게 사랑을 받고 엄마가 오래 살아 그를 보살폈다면 나아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피노키오> 속의 아버지들과 마찬가지로 빅터는 자신의 기준과 속도를 정해놓고 아들인 피조물이 따라오지 못하자 그를 신체적, 정서적으로 학대한다. 그가 엄마의 죽음으로 더 이상 발달시키지 못해 숨어버린 그림자인 여리고 순수한 측면이 피조물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 더 화를 낸다. 이것은 역사적인 인물인 영조와 사도세자와 비슷하기도 하다. 영조는 자신의 그림자 자체인 아들을 보고 콤플렉스가 자극되어 아들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여 그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었었다. 마찬가지로 빅터 프랑켄슈타인도 피조물에게서 자신의 그림자를 보고 폭발하여 그를 학대하고 죽이려 한다.

이 소설을 쓴 메리 셸리의 상황을 보면 그녀는 괴물에게 자신을 이입했다고 한다. 당시 유부남과 사귀고 전처를 자살로 몰고 간 그녀에게 사회는 싸늘한 시선을 가하며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집안의 명예를 실추시킨 자신을 호적에서 판 아버지를 프랑켄슈타인 박사에 비유하고 자신은 그에게서 버림받은 괴물로 생각했을 수도 있다. 아니면 젊은 시절 자신과 자식을 남겨놓고 배를 타고 나가서 실종되어 버린 남편을 창조자로 보았을 수도 있다.

또는 밀턴의 『실낙원』에서처럼 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이 자신을 흙으로 빚어 인간을 만들어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는데 만들어놓고 버린다고 원망하는 것의 비유일 수도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해석처럼 낳아놓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유기하고 학대하는 아버지의 비유일 수도 있다. 이처럼 좋은 작품은 사람마다 내용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자신을 여러 이유로 주인공에 대입할 수 있는 작품이다.

어떤 쪽으로 해석하든 이것은 창조자의 피조물에 대한 무책임을 비판한다. 만들어놓고 나 몰라라 하는 것은 직무유기이다. 만들었다면 사랑하고 성장시킬 의무가 있다. 사랑받지 못한 존재는 자기는 쓰레기이며 누더기라고 느끼며 괴물이 된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피조물을 괴물로 만든, 사랑하지 않은 창조자가 괴물이다. 피조물이 만들어달라고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만들어놓고 외롭게 만든 자는 무책임하다.

나는 이 작품을 신학자처럼 신과 인간의 관계 같은 거대한 담론으로 이해할 능력은 없고, 감독처럼 아버지와 자식 관계로 받아들인다. 항상 문제의 출발점은 아버지이다. 기예르모 델 토르는 영화에서 미숙한 아버지가 어떻게 깨달음을 얻고 성숙해 가는가를 보여준다.

심리학적으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보이기도 한다. 아들과 아버지는 경쟁자이고 아들은 아버지를 뛰어넘으려고 하는 것이다.

또 성장하면서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하는 현인(유사 아버지)으로부터 지혜를 얻기도 한다. 현실에서 현인은 선생님일 수도 있고 좋은 친척일 수도 있다. 그들은 원래는 아버지가 했어야 할 제자의 정신적 성장을 돕는다. 그들이 좋은 사람이라는 자존감을 형성시켜 준다.


영화에서는 소설과 달리 마지막에 부자간의 화해와 용서로 마무리가 되어 후련한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마침내 상처투성이 아들은 괴물 아버지를 용서하는 것이다.

바이런의 말 “마음은 부서질 것이나, 부서진 채로 살아가리라”처럼, 피조물 아들은 산산이 부서진 마음을 갖고 자신을 받아들이며 살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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