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으로 메꾼 역사
시간 여행을 하지는 못하므로 과거 역사의 현장으로 직접 가 볼 수는 없다.
그래서 후대의 이야기꾼들은 몇 가지 내려오는 사실을 뼈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그 몇 가지 사실도 정치적인 조건들 때문에 축소되고 확인되지 않는 야사들도 포함된다.
단종의 이야기는 그 비극성 때문에 여러 번 변주되며 회자되었다. 물론 어떤 시각으로 들여다보는지가 다 다르고 간극을 메꾸는 상상이 작가마다 다르다.
이번 작품 <왕과 사는 남자>에서는 유명한 계유정난을 직접 묘사하지도 않았고 세조의 얼굴조차 나오지 않는다. 장항준 감독은 단종 이홍위와 그를 거두어 준 엄홍도와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춘다. 영화의 재미와는 별개로 감독이 무엇을 말하고 싶었나에 대해 집중해보고 싶다.
단종이 왕위에 오른 게 12세라고 하고 몇 년 지나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 청령포에 귀양 와서 죽은 것이 17세라고 하니 파란만장한 10대를 보낸 셈이다. 그의 숙부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왕위를 찬탈하고 세조가 된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고, 세종의 6번째 아들 금성대군이 단종의 편에 선 것도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얼마나 큰 규모의 역모를 꾀하였는지는 사실 아무도 모른다. 한명회가 화근을 없애려고 덫을 놓고 혐의를 부풀렸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금성대군이 숙부로서 단종을 심적으로 지지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그는 어린 조카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을 것이다.
나이 든 입장에서 10대의 소년이 얼마나 심약한지를 안다. 단종의 경우, 어머니가 출산하고 금방 죽었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엄마도 없이 자랐다. 할아버지 세종과 병약한 아버지 문종은 너무 빨리 세상을 떴으니 기댈 데가 없었을 것이다. 이 지점에서 관객들은 단종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 아이는 평생 어른들에게 휘둘려 불안에 떨며 짧은 생을 살다가 죽었을 확률이 높다.
나중에는 뗏목을 타지 않으면 나갈 수도 없는 청령포에 귀양을 가서 몇 달을 살다가 죽음을 맞이했다. 누구도 그가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모른다. 알려진 바는 몇 달 안 되어 그가 죽었고 시신을 수습하는 자는 3족을 멸한다는 세조의 명령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무릅쓰고 엄홍도라는 자가 물에 떠다니는 유해를 관에 넣어 장사를 치렀다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단종의 인생을 평생 벌벌 떨다가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은 사람이 생긴다.
장항준 감독은 멸문지화를 당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단종의 유해를 수습해 준 엄홍도 이야기에서 둘의 관계가 부자 관계에 버금가는 사이였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가설을 세우고 밀어붙였다. 감독은 이홍위가 이 외로운 귀양지 생활에서 엄홍도를 아버지처럼 여기고 의지했다고, 또 마을 주민들과 각별한 시간을 보냈다고 상상했다. 또 거기서 단종이 인간으로서 왕으로서 성장하면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기의 뜻대로 그 기간을 살았다고 상상했다.
그가 늘 쫓기는 노루로 상징되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 세조를 은유하는 호랑이를 활로 쏴서 죽였다거나, 주민들을 교대로 밥상으로 초대하여 식사를 같이 하며 백성들의 사는 이야기를 들었다는 이야기를 만들었다.
이런 방식으로 그는 단종의 마지막이 겁에 질리고 쓸쓸하지만은 않았다는 것과, 그가 만일 왕을 계속했다면 훌륭한 왕이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그와 우리를 동시에 위로한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 같은 사람은 상상에서 더 나가서 영화 속에서 역사를 바꾸어버리며 관객을 치유한다. 실제로는 히틀러가 자살할 때까지 만행을 한 것을 알지라도, 영화 <바스터즈>에서는 히틀러를 파리의 극장 안에서 불에 타 죽게 만들어 복수하며 카타르시스를 선물한다. 또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는 실제로는 잔혹하게 살해된, 그당시 만삭이었던 여배우 샤론 테이트를 살리고 살인범들을 처단한다. 우리는 현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영화를 보고 그녀가 살았다면 행복한 엄마, 좋은 배우가 되었을 것이라는 알고 있다고 고백하며 그녀를 위로하고 감정적으로 치유를 받는다.
마찬가지로 단종이 제대로 성장했다면 좋은 왕이 되었을 거라고 믿는 행위는 죽은 이홍위와 우리를 위로하는 작업이다.
영화 전반부에 엄홍도를 너무 가볍게 묘사한 것에 대해서는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그는 아마도 어른답고 진중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와 같은 상상의 방식으로 단종을 바라본 감독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관객은 위로를 받고 단종을 보낼 수 있었다. 감독은 그가 죽은 것은 자신의 잘못이 아니며 이홍위는 충분히 훌륭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는 소년이었다는 메시지를 성공적으로 전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