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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형 Feb 28. 2022

예술

2022. 02. 16.

칸딘스키는 이렇게 썼다. "모든 예술작품은 그 시대의 자식이며, 때로는 우리 감정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이 유명한 문장에 대한 이해가 문장의 앞쪽 절반에 치우치면 문장은 본색을 잃게 되는 것 같다. 그의 말 속에서 예술작품은 모순적 위상에 끼어 있다. 창작이 단순히 시대에 의존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창작은 어떤 감정, 그 창작을 통해서만 탄생할 수 있는 고유한 감정을 조직한다. 이 일련의 연쇄는 명쾌하게 결정론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대는 예술을 낳고, 예술은 감정을 낳는다. 즉 시대가 예술을 매개 삼아 감정에 강림(incarnate)한다. 이는 사실과 반대다. 오히려 예술의 성격은 시대가 아니라 그 부산물인 감정에 의해 결정된다. 감정은 우리가 현재를 실체화하는 수단이다. 시대란 일종의 조형물이며, 감정의 파도가 개별 지형과 부딪혀서 만드는 천차만별의 무늬에 붙여지는 이름이다. 지금-여기의 지형은 감정을 통해서만 읽힐 수 있는 패턴이 된다. 피카소가 그린 스탈린의 초상은 이 기묘한 전도를 잘 보여준다. 그 그림은 당시 스탈린의 추종자들을 화나게 했고, 훗날 피카소의 추종자들을 웃게 했다. 일화는 소련 붕괴와 대중적 이념의 변화를 직접적으로 예시한 다른 어떤 그림들 못지 않게 능률적으로 비슷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미술적' 효과의 가장 큰 부분은 초상 자체가 아니라 초상을 앞에 둔 우리의 반응이다. 시대는 감정의 출발점이지만, 감정이 거기에 되돌아왔을 땐 이미 달라져 있는 출발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술이 차별화의 욕망과 스스로 어긋나는 방식이다. 그것은 자신과 차별되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문장을 읽으면 칸딘스키가 정말 무슨 얘기를 했는지 더 잘 드러난다. "그리하여 각 시대의 문화는 결코 반복할 수 없는 고유한 예술을 창출해낸다." 예술이 시대의 자식이라는 전제가 옳다면 예술 또한 새 시대를 낳을 수밖에 없다. 예술이 특별히 새롭거나, 그 예술을 낳은 시대가 도래하는 것들에 대해 남다르게 열려 있어서가 아니다. 창출된 감정이 반드시 고유하기 때문에 예술 자신도 고유하게 정의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끝없는 갱신이라는 오랜 굴레에 대해서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진보란 우리 중 가장 앞서 있는 존재가 깔대기처럼 하늘의 빛을 받아 뿌려준다는 식의 우화가 아니다. 우리가 어딜 가더라도 언제나 "지금 여기가 맨 앞"(이문재)이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자식이다. 우리는 사람을 낳을 수밖에 없다. 이 논리는 얼핏 정신사에 지울 수 없이 낙인 찍힌 괴멸적인 규격화의 능력, 먼 옛날에 이미 프로크루스테스라는 인물로 의인화되었던 전통에 호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전혀 다르다. 우리가 사람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낯선 조건 아래에서, 어떤 낯선 조건을 '불러오는' 생명을 낳더라도 그것을 사람으로 불러주는 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게) 사회의 책임이라는 뜻이다. 시대가 요구하는 말은 없다. 누구나 그걸 찾아 헤매지만 결국 시대의 요구는 시대에서 발견되지 않는다. 말이 바로 시대의 요구다. 예술성을 재단하는 감정은 반드시 최첨단의 감정이다. 미래가 그 감정에 재귀할 것이다. 책임은 거기서 발생한다. 예술가를 정의하는 또 하나의 좋은 방법 같다. 자기 감정에 책임을 느끼는 사람. 그것이 사람인 양 맞이하거나 내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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