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20.
패션 소비시장의 민주화에 대해 생각한다. 시장이 민주화한다는 얘기가 무슨 동어반복인가 싶지만, 소비란 것은 매매(또는 더 큰 범위에서 교환)에 위계를 도입하는 행위로 설명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성격이 얼마간 해소되는 것처럼 보이는 일도 생긴다. 소비자는 자신 안에서도 위계를 만듦으로써 소비를 완성한다. 우리가 흔히 '스타일 아이콘'으로 불리는 인물들을 어떤 방식으로 선망하는지를 보면 이 점이 잘 나타난다. 그를 그려내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어떤 소비자였는지에 먼저 주목한다. 그의 근원적 자아, 일종의 순결한 마네킹을 가정하고, 그 주변에 가깝거나 멀게 수많은 대상들을 배치하면서 한 인간의 내적 풍경을 객관적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그는 어떤 안경을 썼다. 그는 버번 위스키를 즐겨 마셨다. 그는 누구와 친밀했고 누구와 평생 반목했다(이때 인간관계는 최고 효율의 장신구다).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자기 이해도 시도한다. 비유하자면 이 상황은, 누군가가 자신을 해(日)로 가정하고 해의 생애를 상상 속에서 겪어 보려고 할 때와 비슷하다. 그는 해와의 실존적 괴리를 통해서만 그 상상을 할 수 있다. 왜 그럴까? 그는 지구인의 입장에서 해의 객체성을 구성해야 하는데, 지구인 또한 해의 입장에서 필시 객체이기 때문이다. 해는 언제나 관찰자인 나에 대한 해다. 즉, 내 주위를 일정한 간격을 두고 맴도는 사물들, 그들에게 주어진 가상의 관찰(나를 향한 관찰) 능력에 의존해서만, 더 정확히는 그들에 대한 나의 단계적 투영에 의존해서만 나 자신도 이해된다. 이런 소비지향적 자아는 그 자체로 유해하지도 않고 제거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윤리가 애초에 그렇듯이, 또 다른 의식 있는 자가 나의 자기 이해와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등장할 때 고민거리 역시 등장한다. 매매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비시장이 민주화 되어간다는 건 다음 두 명제를 함축한다. 첫째, 소비적 자아상을 공급하는 생산자와 수용자 간의 담론 내 위계가 해체되고 있다. 둘째, 소비자 개인의 소비 대상에 대한 보다 자의적인 '배치' 가능성이 늘고 있다. 둘은 실과 바늘 같은 얘기다. 발화자의 권력이 기반을 잃으면 청중이 그 자리에 새 언어를 쌓기 시작한다. 이는 익히 다음과 같은 선언의 형태로 널리 알려진 변화다. "소비는 새로운 창조다." 나는 이 말이 반쯤 거짓말이라고 생각한다.
소위 '신명품'으로 불리는 일군의 브랜드가 새 성좌를 이루고 있다. 계층적으로 이 성좌는 새로운 게 아니다. 예전에는 이자벨 마랑(이자벨 마랑), 쟈딕 앤 볼테르(티에리 질리예), 아크네 스튜디오(조니 요한손) 등을 포함해 신진 디자이너 브랜드 또는 중가형 디자이너 브랜드로 이름 붙여진 범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 이들 안에서도 가격대와 브랜드 성격은 천차만별이었지만, 전통 패션 하우스와 구별되는 어떤 종류의 럭셔리를 표방한다는 점에서 큰 흐름을 공유했다. 익살스럽거나 의도적으로 편안한 것까지도 럭셔리일 수 있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런 점은 메종 키츠네나 아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들에겐 '준명품'도 아닌 '신명품'이라는 라벨이 붙었고, 이는 다음 사실들을 암시하는 것 같다. 우선 그들 브랜드를 '명품'으로 인식하는 소비층이 대거 등장했다는 것. 이건 패션 산업이 염두에 두는 주소비층의 연령이 공히 더 낮은 데까지 퍼졌다는 의미기도 하다. 메종 키츠네의 '여우'나 아미의 '하트'는 정확히 톰 브라운의 '삼색'이 하던 일을 훨씬 저렴하게 해낸다. 그것들은 일단 매력적인 디자인 요소로 기능하고(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도 그걸 소비하는 이에 대해 뭔가를 증명해준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다수에게서든 소수에게서든, 그는 갈라내어진다. 물론 오늘날엔 그 긍/부정과 다/소수 사이의 여론 이동이 갈수록 빨라지는 현상이 두드러진다. 여기서 파생하는 또 하나의 주요 시사점은, 일단 브랜드가 '명품적'인 역할을 한다면 소비자는 그것이 정말 '어떤' 브랜드인지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컨대 브랜드 간의 경계와 더불어 명품의 내연이 점차 약화한다. 기리보이의 "구찌 루이 휠라 슈프림 섞은 바보"('Flex')라는 가사는 시의적절했다. 명품이라는 개념이 후기 산업 사회에 진입해 위상을 드러내던 시기에, 가령 디올과 발렌시아가는 각자의 영역을 고수했다. 부유한 누군가가 디올이 아닌 발렌아가를 택할 때 그는 다름 아닌 발렌시아가의 의미 체계에 접속하고자 했다. 이제 브랜드는 하나의 풀(pool)이다. 실제로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두 하우스가 다른 스토리를 전달하고 있음에도(킴 존스의 디올에 이르러서는 그렇지만도 않아 보이나, 이는 큰 틀에서 뎀나 바잘리아의 성취일 것이다), 그들은 명품이라는 포괄적 범주 안에서 균등한 기호로 일한다. 그들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들을 섞어버릴 수 있다. 어떤 브랜드가 트렌드를 이끌었는가의 문제, 그러니까 패션-예술에서 불가피하게 주목받아 온 '크레딧'의 문제조차도 중요성을 잃는다. 트렌드부터가 귀속적이기보다는 어떤 보편적 지침에 기여하기 때문이다. 대중은 브랜드의 지향점을 딱히 참고하지 않는 새 소비패턴을 만들어간다. 국내 최대의 매스편집샵에 속하는 무신사나 위즈위드 등에는 3만 원짜리 에잇세컨즈 바지와 150만 원짜리 구찌 바지가 함께 입접해 있다. 최대한 많은 선택 가능성에 대한 최대한의 접근성이 '자유'의 좁은 정의일 수 있다면, 그런 의미에서 우린 분명 더 자유로워진 것 같다.
이런 상황을 소비자가 달갑지 않게 여길 이유는 없다. 그러나 "소비는 새로운 창조"라는 말이 (적어도 반쯤은) 옳다면, 창조자로서의 소비자 또한 그 편의적인 자유 개념이 불가피하게 창조 행위와 반목하는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패션 창작자들이 이미 같은 딜레마 안에서 오래 허우적대는 중이니까 말이다. 사태는 일방향적이지 않다. 소비자가 창작자의 발화 권력을 '중심 없는' 권력으로 재구성한다는 건, 창작자 또한 자신을 창조 행위에 대한 일종의 소비자로 인식하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들은 과거보다 더 자유로울까? 내가 아는 한, 지향이 없는 순수 상태("마네킹")는 망상이다. 소비하고 있으면서도 얽매여 있지 않은 상태, 어떤 브랜드의 이념에도 이입해 있지 않은 상태, 그런 상태는 성립되지 않을 뿐더러, 상상해보더라도 그 결과는 무한한 창조 가능성으로의 열림이 아니다. 창조의 필연성이 훼손될 따름이다. 창조적인 활동은 'X가 Y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논리적 인상을 솟아오르게 하는 일이다. 이 장면에선 이 인물이 이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다. 이 옷은 이런 소재로 이렇게 구축될 수밖에 없다. 그 인상이 설득적일 때 사후적으로 '아름다움'의 기표가 적용되는 셈이고, 주체의 창의 정신과 자유로움에 대한 상상도 거기서 출발한다. 즉 창작은 필연성의 감옥을 벗어나는 일이 아니라 어떤 필연성에 대한 강력한 선택이다. 이 전제를 믿지 않으면서 '새로운' 창조를 희구할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패션 자신조차 패션을 피상적인 장르로 이해하게 된다. 의식하는 인간과 물리적 기호들 사이의 대화를 주재하는 패션-예술의 역량은 가난한 미신이 된다. 예술적 자각 없는 일상이 가장 치명적인 패션 경험으로 인정받는다. 로고는 공중을 흘러 다니는 창조성, 그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