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 결혼의 안정성에 대하여
우리는 왜 결혼을 할까?
내 구독자라면 “사랑해서, 같이 있고 싶어서, 여생을 같이 보내고 싶어서” 등의 전통적인 결혼의 이유가 동거로도 충분히 충족되는 것을 보아왔을 것이다. 이미 같이 살고 있기에, 보험 수령금과 같은 결혼의 법적 구속력이 필요한 특수 상황들을 체험해 나가며 나 역시 결혼이 필요한 상황이 무엇이 있을지 분석해 나가고 있는 중이다.
최근 친구들 모임에서 한 친구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만약에 남편의 연봉이 1억이고,
생활비를 줄 테니, 혹시 일하고 싶지 않다면 쉬어도 돼”라고 말한다면,
자신의 직장을 그만둘 용이가 있는가?
재벌집이 나오는 드라마처럼 몇 백만 원을 생활비로 매달 줄 테니, 직장을 “포기하라”도 아니고, 정말 나에게 경제적 노동의 자유를 허락하는 남편이라니, 이 가정 자체가 드라마보다 더 비현실적으로 느껴져, 대관절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쳐다보았다. 사연은 내 친구가 이직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뜻대로 되지 않아 반려자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그녀의 반려자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연봉을 공개하면서, 우린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네가 쉬고 싶다면 충분히 지원해 줄 수 있다는 제안을 했다는 것이다. 모두의 꿈이 퇴사인 K-직장인에게 이제 ‘그만 일하고 쉬어도 된다’라는 꿈만 같은 대사를 이뤄낸 친구 덕분에 나 역시도 언젠간 저 대사를 들을 수 있다는 한줄기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라며 마치 프러포즈의 승낙을 기나리는 사람처럼 그녀를 바라봤고, 그녀는 다소 어색한 얼굴로 “아 그런데, 마음만 받겠다고 했어”라고 답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미친 거 아니야?가 나왔겠지만, 그녀의 대답에 우리의 반응도 ‘이해한다, 어쩔 수 없지’와 같이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무덤덤한 반응의 가장 큰 이유는 그녀의 관계가 법적 구속력을 하나도 인정받을 수 없는 동성관계이기 때문이다.
여자친구분과 함께 살고 있는 친구는 지금 생활비를 받아 생활 자체를 지속하는 데에는 문제가 없지만, 훗날 상대방이 아프거나 사망할 경우, 혹은 헤어지게 될 경우, 법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같이 살고 있으면서, 경제적 활동을 통해 서로의 가계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 나와 동일함에도 그녀의 관계에 대한 법적 정의는 남과 남처럼 어떠한 법령으로도 규정지을 수 없었다. 친구는 현실이 이렇기에 언제 바뀌지도 모를 법의 제정에 소급 적용을 위해서라도 혼인신고 반려 사유서를 챙겨놓거나, 동성 결혼이 인정되는 해외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방법을 알아봤다고 했다. 무덤덤하게 설명했지만, 단어 하나하나에서 그녀가 여자친구를 법적 동반자로 인정받기 위해 많은 조사를 했구나 싶었다.
친구는 지금 당장 결혼이 하고 싶은 것은 아니지만, 언젠가 서로가 동반자, 반려자로 인정받기 바란다고 했다. 그리고 나의 “동거로 충분하잖아, 결혼을 대체 왜 해야 할까?”라는 물음에는 나에게 동거와 결혼이라는 선택지를 내가 원하는 순간에 선택할 수 있는 특권이 내재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전통적으로 같이 살기 위해 요구되던 결혼 대신에 동거를 선택했고, 이는 언제든지 내가 원할 때 법적 결혼 혹은 결혼식만 올리는 사실혼 관계로 변경 및 업그레이드할 수 있다는 뜻이다. 반면 법적 결혼이 선택지에 아예 존재하지 않는 친구의 경우, 현재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은 동거밖에 없었다.
우리는 흔히 결혼을 하면 안정성이 생긴다고 말한다. 난 항상 그 안정성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궁금했다. 내가 끊임없이 좋은 반려자감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결혼시장에서 드디어 나를 더 이상 홍보하지 않아도 되고, 같이 갈 사람을 찾았다는 것을 의미할지, 혼자 벌어 월세도 내기 힘든 세상에서 둘의 월급을 합쳐 전셋집을 구하는데 한걸음 다가간다는 것인지. 다시 한번 동거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왜 결혼 = 안정성으로 귀결되는 것일까 하고 말이다. 친구의 사례를 통해 결혼의 안정성이란 법적 구속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음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법적 구속력이 있는 관계는 둘이 함께 이룬 경제적 자산을 법과 사회라는 테두리 안에서 보장받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법적 구속력이 앞으로의 불안정한 한 개인의 삶을 믿고 먼 미래를 그릴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데 굉장히 중요한 요인임을 말이다.
남녀의 혼인신고는 꽤 어렵지 않다. 오히려 절차가 너무 간단해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우리는 방송을 통해서 심심찮게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쉬운 절차 하나가 누군가에게는 도전이며, 내가 언제든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누군가에게는 아예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일 수 있다. 그리고 쉬운 절차라고 하기에 이는 우리 삶을 살아가는데 미래 계획, 자산의 형성, 사회의 혜택 및 권리를 향유하는데 너무나 많은 영향을 끼친다. 많은 토론을 이어나갈수록 동성 결혼 합법화 및 생활 동반자법이 서둘러 제정되어야 한다는 데에 힘이 보태어지는 이유이다.
* 친구의 동의를 얻어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 PS. 같은 대사를 제 반려자에게 하였더니, 본인도 듣고 싶은 말이라 하더군요. 성별을 떠나서 경제적, 노동에 관한 자유는 모든 K-직장인이 듣고 싶은 말이 아닐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