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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농약맛댕댕이 Sep 22. 2023

감정의 세탁기를 돌려보세요.

정서적 완벽주의자(3)_내 세탁기를 마주하다.

전편 : 환자분은 정서적 완벽주의자입니다.


선생님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키보드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고, 동기들이 웃을 때마다 너무 속상해요. 그냥 그렇게 있어야 하나요? 


마음껏 속상해하시면 됩니다


에?

마음껏 속상해하라니.

이거 마치 나를 집어삼킬 것 같은 파도 앞에서 그냥 바라보고 있던지, 더 나아가 아픈데도 파도를 올곧이 맞으라는 소리 아닌가. 머리 속에 수많은 물음표가 떠다니고 있을 때, 하나를 잡아 선생님은 말씀을 이어나가셨다. 


감정의 인정은 그것의 고통을 온전히 느끼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나의 감정 세탁기를 상상하시고,
세탁기 안에 속상함, 서러움이라는 감정이 돌아간다 생각해보세요.



또 왠 세탁기? 

세탁기 소리를 듣자마자, 내 감정 세탁기는 어떻게 생겼을까 상상했는데(MBTI가 파워 N이다), 세련되게 생겨 인테리어 효과까지 있는 요즘 타워형 세탁기가 아니라 지극히 오래되고 소리까지 잔뜩 내는 통돌이 세탁기 이미지가 떠올랐다.


 선생님은 감정에는 다양한 감정이 있고, 이를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이렇게 관점을 바꾸려는 모든 행위는 인지치료에 해당이 되는데, 가장 실천하기 쉬운 인지치료는 재가 현재 느끼는 감정을 정의하고, 이를 세탁기에 돌린다고 생각함으로서 감정과 나를 분리시키는 것이라 말씀하셨다. 세탁기 안에는 우울감이 많을 수도 있고, 불안감이 많을 수도 있지만, 단 한가지 감정만으로 돌아가는 세탁기는 없음을 인지함으로서, 내 감정을 인지하고 나아가 인정해주는 방법이었다. 


 더 나아가, 세탁기에 불안함 혹은 우울함 같은 감정만이 가득 돌아가고 있다고 느낄 때는, 소리를 내서 세탁기 안에 우울함이 많구나를 말하거나 말할 수 없는 상황일 경우, 해당 내용을 종이에 적으라고 말씀하셨다. 인지치료는 처음에는 별로도 아니고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 처럼 느껴지지만, 계속 반복하면 뇌는 반복 행동을 인지하여 불편한 감정이 들 때, 습관으로 작용한다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때부터 나는 타자기 소리가 클 때마다, 셋도 아닌 한명이라도 풉이라고 웃는 순간마다 시간, 상대방의 행동, 나의 감정을 서술하고, 마지막 문장에는 세탁기의 감정이 돌아가고 있다고 적기 시작했다. 첫날은 무려 5분에 한번씩 내 감정을 서술하느라, 맡은 바 업무를 시도하지 못했고, 6시 퇴근 시간에 보니 공책의 3장을 가득채운 것을 확인했다. 그리고 집에 가는 퇴근길에 내가 썼던 내용을 다시 한번 읽어보며, 내 세탁기와 마주했고, 그렇게 29년 동안 한번도 마주하지 못한 나 자신과 인사를 시작했다. 



다음편 : 29년만에 나를 마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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