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에밀 졸라
르누아르, 모네, 세잔. 21세기에도 인기가 사그라지지 않는 인상파 화가들이다. 내가 미술에 대한 흥미를 키우게 된 것도 모네의 그림 덕분이었다. 인상파를 좋아하게 되니 그들이 활동했던 19세기의 파리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생겼다. 색감이 선명하지 않은 인쇄물이나 해상도가 떨어지는 디지털 이미지로 접한 인상파 그림만으로도 파리에 대한 동경과 환상은 커져갔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 후기에 해당하던 시기에, 그림에 묘사된 파리 사람들은 공원에서 여가시간을 즐기고 집에서 친구들을 초대해 티타임을 가졌다.
에밀 졸라의 <작품>은 인상파 화가들이 막 활동하기 시작한 19세기 후반 파리에서 살아가는 예술가들을 소재로 삼은 소설이다. 세련된 유행을 선도하고 예술적인 분위기가 넘쳐나던 파리는 최고가 되고자 하는 미술가라면 반드시 정복하고 싶은 도시였다.
오후 네 시였다. 아름다운 하루가 태양의 찬란한 가루 속에서 저물어 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마들렌 교회까지, 또 왼쪽으로는 의사당까지 건물들의 선이 저 멀리까지 줄지어 서 있어 하늘에 닿을 듯이 윤곽을 뚜렷이 드러내고 있었다. 한편 튈르리 공원은 키가 큰 마로니에들의 둥근 꼭대기로 겹겹이 둘러져 있었다. 또한 양쪽 인도의 두 녹색 경계선 사이에 상젤리제가가 시야에서 사라질 정도로 아득히 높이 올라가고 있었고, 그 끝에 무한을 향해 입을 크게 벌리고 있는 개선문이 보였다.(중략)
클로드는 전율하며 외쳤다.
“아! 파리……, 이건 우리 꺼야. 이걸 잡기만 하면 돼.”
시골에서 올라와 궁핍한 생활을 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성공할 날을 꿈꾸며 작업에 열중한다. 세상이 자신들을 알아줄 날이 오기를 고대하며 모든 고통을 감내한다. 집에서 등록금을 대어 주거나, 부잣집 사위가 되어 돈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경우는 아주 운이 좋은 편이다.
소설에는 예술계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직종의 인물이 나온다. 파리에서 제일 잘 나가는 미술품 거래상은 사무실과 집을 사치스럽게 꾸미고 컬렉터를 초대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한다. 작가의 작품을 대량으로 사들이고 컬렉터에게는 좋은 작품과 그저 그런 작품을 세트로 판매한다. 고객이 매도하고자 하는 작품을 사 주는 대신 고객에게 더 비싼 작품을 판다.
정상에 오른 예술가의 불안과 좌절은 젊은이들의 고뇌 못지않다. 젊은 예술가들의 존경을 받는, 명망 있고 성품이 좋은 중년 화가의 걱정을 들어보자.
자, 유명인사여, 대 예술가여, 지혜를 짜내고 피를 불태우게나. 그래서 자네들은 높이 올라가겠지. 더 높이, 더 높이. 만약 자네가 올라간 정상에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그것도 가능한 한 길게 제자리걸음을 할 수 있다면 그 이상 좋은 일은 없겠지. 그러나 후퇴를 한번 맛보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러면 그때는 자신에게 제동을 걸 수밖에 없다네. 자네의 재능은 이미 시대에 뒤처진 것이 되고, 불후의 대작을 창조하는 힘이 상실되었다는 고뇌에 사로잡히지. 더 이상 아무것도 창조할 수 없다는 자책에 정신을 잃고 말지.
화가라면 꼭 출품하고 싶어 하는 살롱전에는 엄청난 인파가 몰리고 살롱전에서 떨어진 작품을 전시하는 낙선전은 살롱전보다 훨씬 더 인기를 끈다.
그러나 처음에는 분명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곳에는 살롱전과는 달리 청춘의 폭발이라고 할 수 있는 독특한 활기로 팽배했다. 이미 꽉 들어찬 관람객은 시시각각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들이 모두 공식적인 살롱전을 버리고 호기심에 이끌려, 또 심사위원들을 심판하고 싶은 마음에 이곳으로 달려와 이미 문에서부터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되리라는 확신에 즐거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젊은 예술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인 낙선전은 주류 미술계와는 다른 참신하고 대담한 작품들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하다.
낙선전에는 전쟁터와 같은 활기, 그것도 젊음의 혈기에 몸을 맡기고 그날 안으로 적을 쳐부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서 새벽 동이 터올 때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적진을 향해 돌격하는 그런 활기가 느껴져 왔다.
파리에서 고군분투하며 지낸 몇 년 후, 시작점이 비슷했던 친구들의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성공할 줄 알았던 화가는 여전히 창고 겸 집에서 일생일대의 대작을 창작하는데 여념이 없다. 부인과 자식은 빈곤과 절망 속에서 겨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다. 성품이 좋은 여자와 결혼한 작가는 출판한 책이 인기를 끌어 부자가 된다. 골동품을 수집하고 매주 친구들을 초대해 근사한 저녁을 대접한다. 기대에 못 미치는 본인의 재능을 인정할 수 없는 예술가는 점점 불행해진다.
<작품>에 나오는 다양한 등장인물의 모습은 당시 실존했던 예술가들과 상당 부분 겹친다. 불행한 삶을 사는 화가 ‘클로드’는 세잔을, 성공한 작가로 나오는 ‘상도즈’는 에밀 졸라 자신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에밀 졸라는 세잔과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자란 절친한 친구였다. 파리에서의 삶을 견디지 못하고 고향으로 돌아간 세잔으로서는 에밀 졸라의 이 소설이 반가울 리가 없었을 것이다. 결국 <작품>이 출간된 이후 세잔은 졸라와 연락을 끊었다고 전해진다.
소설에는 파리의 거리를 묘사한 부분이 자주 나온다. 새벽, 아침, 오후, 저녁, 한밤중 등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에 의해 변하는 광경을 세세하게 묘사한 부분을 읽고 있으면 마치 인상파의 그림을 감상하는 것 같다. 파리 지도를 펼쳐놓고 센강을 따라 다리와 거리를 하나씩 찾아보면서 읽고 싶어 진다. 다시 파리를 가게 되면 졸라가 묘사한 거리를 샅샅이 걸으며 파리를 경험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