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그리고 타인에게 우리는

by 글짓는 날때

펜으로 꾹꾹 눌러쓰던 편지가 생각납니다.

책상에 앉아 스탠드 조명을 켜고 라디오를 통해 음악을 듣습니다.

마음만 한껏 들떠 마치 그 아이가 옆에 있는 것 마냥

한껏 붉어진 얼굴로 정성 들여 마음을 담아 써내려 갑니다.

그리고, 봉투에 담기 전 읽어봅니다.


#01_이건백프로흑역사생성이다.png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 [삼행시 클럽] 해체 기념촬영 중 민영이의 독백



그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매일 맞이하는 오늘도 생에 처음이기에 일단 지금을 이어나갑니다.

다행히 수없이 지나간 어제라는 시간의 학습을 기억하고

온 마음과 노력을 들여 흑역사 생성을 방지합니다.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는 걸 아는 거죠.


쓰기를 시작합니다. 일단 문장을 이어 나갑니다.

다행히 그동안의 글들이 어떤 형태인지 기억하기에

온 마음과 정성을 들여 지난 글보다 나은 글을 짓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럼에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정말 다행이죠.

인생과 다르게 'Backspace'라는 전지전능한 구원의 열쇠가 있다는 게.


그리고 그 열쇠로 기어이 흑역사를 생성합니다.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상항이 온 거죠.

최소한 돌아볼 수 있는 지점은 남겨뒀어야 했는데.


봉투에 담기 전 읽었던 편지가 생각납니다.

온갖 낮 없음에 구겨 버린 편지, 몇 번을 다시 써도

구겨버린 편지 때문인지 구겨진 마음 때문인지

결국 처음 쓴 그 편지만큼도 잘 쓰지 못한.


결국 쓰는 정성만큼이나 정성 들여 구겨진 편지지를 펴봅니다.

구겨진 마음을 애써 달래며 한 글자 한 글자 옮겨 적습니다.

비록 엉망이어도 전하고 싶은 분명한 마음이 있기에

창피하지만 나의 마음을 적은 글이었습니다.


네,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답장을 받습니다.

흑역사는 생성되지 않았습니다.


#03_지원동기가_테니스의-왕자를-찾으러-왔습니다..png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 정희의 테니스장 아르바이트 면접 중


다시 편지를 보내기 시작합니다.

달라진 건 없습니다. 단지 맨 윗줄에 있어야 할 '받는 이'가 없다는 점을 제외하면.

오늘을 기록하는 일기와도 다르고 순간을 기록하는 SNS와도 다를 거예요.

오롯이 나누고 싶은 마음과 하고 싶은 이야기를 정성을 다해 담을 뿐입니다.


신기하게도 '받는 이'를 적지 않은 편지에도 답장은 도착합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분명한 답장을 받습니다.

공감의 문장들에서

나 몰래 채워진 작은 하트의 울림에서

나와 같은 마음을 적은 어떤 이의 편지에서도.

(제가 받을진 모르셨을 겁니다.)


테니스의 왕자는 있더군요.

내가 넘긴 공을 기꺼이 받아 나에게 다시 넘겨주는

그래서 또 가쁜 숨을 몰아쉬고 한 발짝 더 움직이게 해주는

고맙고 소중한 '받는 이'와 '보내는이'들이.


#05_그리고-넌-뭐-그림-그린다고-하는데_현실적으로-생각해-보는게-필요하지-않을까.png 영화 '성적표의 김민영' , 정희에게 충고하는 민영이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는 공간,

이곳 'Brunch'에서 마음을 전하고 이야기를 해주는 많은 사람들.

그중 감사하게 나에게 전해진 수없이 많은 이야기들.

소중하게 적힌 '보내는이'의 이름들을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저마다의 마음과 색깔과 음색을 담고 현실과 의지와 소망을 입힌

그들의 이름들, 그리고 이름 앞에 가만히 자리한


"from"이 아닌 "by"


저마다의 방식으로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을, 이미 이루어 낸 사람들.

저 또한 그렇습니다. (헤헷.. 뿌듯 뿌듯)


이곳에서 'by 글 짓는 날 때'라는 이름으로 마음을 담은 지

오늘로 딱 3개월이 되었습니다.

정체되고 답답한 상황 속, 현실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을 해보고 싶었고

여전히 부끄럽고 창피한 필명이라는 걸 갖게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뭘 이루었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럼에도 작고 하찮지만 꾸준히 쓰고 있다는 성취감은 있고요.

음, 성적을 매기기엔 하찮을 것 같습니다.

솔직히 뻔하잖아요. 좋은 기분 망치긴 싫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즐겁고 싶습니다.

어쩌면 계속 즐거운 일로만 남을 수도 있겠죠?

그것 만이라도 계속할 수 있다면 행복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또 '수취인 불명'의 글을 지었습니다.

어느 분에 닿게 되면 또 부끄러워할 이야기지만

이러한 글이라도 닿았으면 좋겠습니다.




저의 성적은 채점 불가지만

대신 당신의 성적은 알고 있습니다.


마음과 행동 A

내가 이상한 이야기를 해도 '아, 그렇구나'하고 이야기를 들어줌
밖이 아니라 안에서 나를 봐주고 있다는 느낌

- 정희가 평가한 민영이의 성적표 中 -






info.

영화_ 「성적표의 김민영」 2022년

좋아하는 문장_"내가 투명 인간이야? 그냥 방문마다 통과하고 그럴까"

공감하는 문장_"가끔씩 이 친구의 상상력이 못 견디게 부럽다. 내가 효용이 없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나만의 킬포_"테니스의 왕자"


epil.

민영이의 성적표를 인용하였지만 A가 확실히 맞습니다.

기준이요?

따뜻한 마음, 포근한 위로, 다정한 칭찬, 비상한 지식, 빛나는 지혜

쓰인 단어들과 쓰인 문장들이 기준입니다.

이의 신청은 불가합니다. 흠!

keyword
작가의 이전글당신의 부재에도 여전히 빛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