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철학으로 읽는 데미안

[데미안]과 베다경 -우파니샤드

by 설기

길을 잃다.


너무 빠르다. 모두가 바쁘다. 정보는 넘쳐나고, 감각은 쉴 틈이 없다. 하나의 생각이 충분히 끓기도 전에

우리는 또 다른 냄비를 올린다. 무언가를 끝까지 바라보기도 전에 다음 화면으로 넘어간다. 요즘처럼 외부 자극이 끊이지 않는 시대에 우리는 세상을 깊이 이해하기보다 빠르게 스캔하는 법부터 배운다.

시간은 잘게 쪼개지고, 감각의 공간도 잘려 나간다. 숨 쉬는 것조차 따로 시간을 내야 할 것만 같다.


지금 우리에겐 싱클레어처럼 밖으로만 열려 있는 감각을 잠시 거두는 용기가 필요하다.

고요함을 맞이하고 침묵 속에서 시간을 다스리며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용기.



[데미안]의 핵심: 브라만과 아브라삭스


우리는 아브라삭스에 대한 그리스어로 된 글을 함께 읽었다. 그가 베다경의 번역 부분을 부분 부분 읽어 주었고, 나에게 신성한 '옴'을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 민음사, [데미안] p.161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에게 읽어 주는 베다경의 구절은, 단순한 이국적 장식이 아니다.
이 장면은 [데미안] 전체를 관통하는 세계관의 핵심을 드러낸다.


그 중심에는 브라만, 그리고 아브라삭스가 있다.


브라만이 “하나이면서 모든 것”으로 우주 전체를 포괄한다면,

아브라삭스선과 악의 통합 신,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닌 존재한 서양 버전이다.


헤세는 동양의 브라만을 서양 신비주의의 아브라삭스로 재해석한 셈이다.



브라만 — 하나이면서 모든 것인 존재


슈베타슈바타라 우파니샤드 4장은 브라만을 이렇게 말한다.


1. 브라만은 특정한 형상이 없지만, 그만이 알 수 있는 뜻에 따라 자신을 다양한 형상으로 나타낸다.


2. 그는 이며 태양이고 이며이다. 그는 바람이며 바다이다. 그는 창조자 프라자파티이며 모든 창조가 비롯되는 황금의 자궁이다.


3. 그는 소년이며 소녀이다. 그는 남자이며 여자이다. 지팡이를 짚고 가는 노인 역시 그이다. 온 세상이 그의 얼굴로 가득 차 있다.


4. 그는 깃이 푸른 새이며 빨간 눈을 가진이다. 그는 번개 치는 먹구름이다. 계절푸른 바다도 그이다. 그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이 온 누리에 충만하게 깃들이어 있다. 그는 이 세상을 낳은 어머니이다.


6. 물질현상은 환영이며 브라만은 이 환영을 만드는 마술사이다.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의 신적인 광채를 나누어 받은 그의 조각들이다.


7. 브라만은 위대한 마술사이다. 소년이 되기도 하고 소녀가 되기도 하며, 새가 되기도 하고 짐승이 되기도 한다.


18–19. 브라만은 모든 가르침과 깨달음의 근원이다. 그는 불멸의 태양이다. 모든 지혜와 빛이 그에게서 나온다.


이 브라만은 하나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다. 형상이 없지만 모든 형상이 되며, 선과 악, 남성과 여성, 인간과 동물, 생과 사의 구분을 넘어선다. 이 지점에서 아브라삭스와 겹친다.



감각을 밖에서 안으로 돌리는 인간


카타 우파니샤드 제2부 1장은 이 사유를 인간 쪽으로 끌어온다.


"스스로 존재하는 브라만은 감각의 문을 밖으로 향하도록 열어 놓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안에 있는 참자아를 보지 못하고 외부 세계만 보고 느낀다. 그러나 밖으로 향하는 감각을 거두어들여, 감각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려 영원불멸의 차원을 추구하는 사람은 자기 속에 있는 영원한 참자아를 볼 수 있다."


이 문장을 [데미안] 위에 겹쳐 놓으면, 싱클레어의 여정이 선명해진다. 그는 밖에서 답을 찾다가 실패하고, 결국 안으로 내려간다. 그때 나타나는 얼굴이 데미안이며, 에바이다.



네 번의 얼굴, 하나의 실체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실체’ 모습을 네 번이나 본다.


첫 번째는 눈을 감고 떠올린 이미지였다.
어른의 얼굴, 연구가나 예술가 같은 얼굴. 그런데 그 안에는 남자뿐 아니라 여자의 기운, 짐승·나무·별 같은 무시간적인 존재가 스며들어 있었다.


두 번째는 눈을 뜨고도 아무것도 보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돌처럼 고요하고 태고처럼 늙은 얼굴. 죽은 것 같으면서도 전대미문의 생명으로 가득 찬 모습이었다.


세 번째는 그림 속 데미안이다. 숱 많은 갈색 머리카락, 절반쯤 여자 같은 입술, 초록빛으로 굳은 두 눈. 한쪽 눈이 다른 쪽보다 눈에 띄게 높이 달려 있었다.


마지막은 스케치가 완성된 순간이다. 그 얼굴은 데미안이면서 나 자신이고, 여자이며 남자이고, 소녀이며 아이이고, 동물이었다. 얼룩처럼 흐릿해졌다가 다시 뚜렷해지는 얼굴이었다.


이는 우파니샤드가 말한 브라만의 얼굴과 닮아 있다. 하나이면서 많은 얼굴. 많은 얼굴이면서 하나의 실체이다.



에바 — 내면의 바다


에바에 대한 언급들 또한 같다.


“그녀는 날마다 달라 보였다. 그녀는 다만 나 자신의 내면의 한 가지 상징이며, 나를 다만 나 자신 속으로 더 깊게 인도하려 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다.” (p.198)


“그녀는 바다였고, 나는 그 안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었고, 나 자신도 별로서 그녀에게로 가고 있었는데, 우리는 만났고, 우리가 서로를 끌어당겼음을 느꼈다. 우리는 함께 머물렀고 희열에 차 서로 가까이에서 소리가 원을 영원히 돌았다.” (p.200)


데미안과 에바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구원자가 아니다. 그들은 싱클레어 안에 이미 존재하던 브라만적 자아의 얼굴들이다. 그의 내면이 스스로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데미안과 에바의 집에 가득했던 히아신스 향기도 우연이 아니다. 그리스 신화 속 소년 히아킨토스의 피에서 피어난 이 꽃은, 싱클레어가 세속의 소음을 넘어 도달한 '정신적 성역'을 상징한다. 겨울의 어둠을 뚫고 피어나는 알뿌리 식물처럼, 이 짙은 향기는 고통스러운 '알을 깨는 투쟁' 끝에 찾아온 옛 자아의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알리는 신호이기도 하다.




검은 거울 앞에서


“붕대를 감을 때는 아팠다. 그때부터 내게 일어난 모든 일이 아팠다.
그러나 이따금 열쇠를 찾아내 완전한 나 자신 속으로 내려가면, 어두운 거울 속에 운명의 영상들이 잠들어 있는 곳으로 내려가면, 그곳에서 나는 그 검은 거울 위로 몸을 숙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면 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이제 그와 완전히 닮아 있었다. 그와, 나의 친구이자 인도자인 그와.” (p.219)


이 검은 거울은 아브라삭스 그 자체이며, 동시에 브라만을 가리키는 상징처럼 보인다.

빛과 어둠, 선과 악, 인간과 짐승을 모두 비추는 거울. 하나의 얼굴만을 허락하지 않는 거울.

싱클레어는 이제 안다. 데미안과 닮아간다는 것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 안에 있던 전체성을 회복하는 일이라는 것을. 싱클레어는 이제 성숙한 자아로서 삶이 주는 고통을 감내하며 살아갈 것이다.




친절한 손


[데미안]은 상징과 신화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동시에 헤세 자신의 내면사를 기록한 자서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싱클레어는 어린 시절의 헤세를 그리고 있다. 싱클레어의 집은 예전에 헤세가 다녔던 수도원으로 그려졌다.


프란츠 크로머는 헤세가 가보지 못한 길에 서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인물처럼 느껴진다. 헤세 안에 있었으나 끝내 선택하지 않았던 또 하나의 가능성. 폭력성과 지배욕, 어둠의 충동이 외부 인물의 얼굴을 쓰고 등장한 것일지도 모른다.


[데미안]은 헤세가 43세에 발표한 작품이지만, 이야기의 출발점은 열 살 전후의 싱클레어다. 이 시기를 다시 쓰면서, 헤세 자신에게도 프란츠와는 다른 의미에서 데미안처럼 인도해 줄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거의 자신에게 보내는, 뒤늦은 손길처럼. 어른이 되고 나서야 어린 시절의 나를 안아줄 수 있었던 나처럼.


“나는 세상의 오솔길들을 똑바로 걸으려고 했는데, 그 길들이 내게는 너무 미끄러웠다. 친절한 손 하나가 나를 잡아 구해 낸 지금 ~~ 나는 자신을 자신보다 더 어리게, 더 의존적으로, 더 어린애처럼 만들었다. ”(p.63)

상냥하고 친절한 것이 좋은 엄마가 되는 길이라 믿었다. 늘 가까이에 서서 아이들의 어려움에 즉각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이제는 생각한다. 그 손이 아이들을 지켜준 것이 아니라, 혹시 자라날 기회를 조금은 빼앗은 것은 아니었는지. 기다리지 못했던 것은 아이들이 아니라, 불안했던 나였는지도 모른다. 진정한 “친절한 손”은 잡아주는 게 아니라, 놓아주는 타이밍을 아는 손이 아닐까.



기도에 대한 또 다른 이해


기도란 바깥의 신에게 무엇을 청하는 말이 아니라, 자신의 가장 깊은 내면에 있는 진짜 자아에게 향하는 말이다.

“한 인도자가 나를 떠났습니다. 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 서 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혼자 디딜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p.172)


싱클레어는 이 말을 종이에 적어 보내려다 멈춘다. 대신 그 기도를 마음속으로 되뇌며 살아간다. 그 기도는 누군가에게 전달되기 위한 문장이 아니라, 자기 안의 어떤 깊은 곳을 향해 울리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우파니샤드와 [데미안]을 함께 읽고 나서, 기도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전에는 기도를 ‘종교인들만 하는 것’, 욕심과 바람으로 가득 찬 행위로 여겼다. 그 편견이 깨지는 순간, 마치 오랜 착각에 돌을 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기도는 가장 깊은 나 자신에게 조용히 말을 건네는 일이라고. 그것이 싱클레어가 배운 기도였고, 지금 내가 다시 배워야 할 기도다. 거울 보고 말하기조차 힘든 나에게 새로운 도전과제가 주어진 것만 같다. 나도 나의 데미안을 만날 수 있을까.




헤세,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하는 시간 갖기.


헤어지기 전, 헤세와 피스토리우스와 함께 잠시 머물러 본다.


“우리는 아브라삭스에 대한 그리스어로 된 글을 함께 읽었다.
그가 베다경의 번역 부분을 부분 부분 읽어 주었고, 나에게 신성한 ‘옴’을 말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옴(Om, Aum)’은 우파니샤드와 요가 전통에서 우주의 근원적 진동, 브라만의 소리로 여겨진다.
그러나 그것은 주문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향한 조율에 가깝다.


편안히 앉아 척추를 곧게 세우고, 호흡을 몇 차례 깊게 들이마신다.
그리고 소리를 세 단계로 나누어 천천히 내쉰다.


아(A) — 가슴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
우(U) — 그 울림이 목을 지나 입술로 이동하는 흐름.
므(M) — 입술을 닫고, 머리 전체에 진동이 번지는 미세한 울림.


그리고 그 뒤에 남는 짧은 침묵.

그 침묵은 소리가 사라진 자리가 아니라,
모든 소리가 돌아가는 자리다.


우파니샤드는 그것을 ‘투리야’라 부른다.
말로 붙잡을 수 없는 의식, 낮도 밤도 아닌 자리.


A : U : M = 1 : 1 : 2라는 비율이 이상적이라고 하지만,
사실 중요한 것은 길이가 아니라 태도일 것이다.


'옴'


'옴'은 흩어졌던 자신을 다시 한 자리에 모으는 소리다. 나만의 데미안을 만나게 되는 비밀의 주문이다. 나만의 데미안을 만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