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아브라삭스

엄마가 되어 다시 읽는 데미안

by 설기

한동안 나는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쓰며 살았다. 아니 '나쁘게 보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상처받지 않으려고, 미움받지 않으려고, 스스로를 자주 검열했다.

평가와 평판으로 만들어진 길은 가면 갈수록 아프고 힘들었던 것 같다.

이 숨 막히는 책임감 속에서 나는 스스로를 너무 잘 가두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시간 동안 『데미안』을 여러 번 읽었지만,

나는 그것을 머리로만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엄마가 되고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은 또 다른 이름의 책임감이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진짜 데미안을 찾고 싶어졌다. 『데미안』 속에 살아 있는 아브라삭스, 나에게도 그것이 있을까. 나는 그 질문에 직면해 보기로 했다.


영지주의는 때때로 하나의 이름을 통해 자신의 세계관을 압축해 보여준다. 그 이름이 바로 아브라삭스다.


아브라삭스는 선만을 대표하는 신도, 악만을 대표하는 악마도 아니다. 그는 신이면서 동시에 악마이며, 빛이면서 동시에 어둠이다. 인간이 오랫동안 나누어 온 모든 이분법을 통과한 이후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통합의 상징이다.


아브라삭스 앞에서는 “착하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전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 먼저 등장한다. 선만을 선택하는 삶은 미성숙한 삶이며, 어둠을 부정하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절반만 사는 존재가 된다.

영지주의시대 유물. 아브라삭스


영지주의는 하나의 종교라기보다 세계와 인간을 바라보는 급진적인 인식 태도에 가깝다.


인간은 본래 죄인이 아니라 본래의 자리를 잃어버린 존재이며, 내부에 신적인 불꽃(신성한 스파크)이 숨어 있으나 물질과 무지의 껍질에 갇혀 있다. 구원은 도덕적 개선이나 규율 준수가 아니라, 기억해 내는 일이다. 내가 누구였는지, 무엇에서 왔는지.



헤르만 헤세가 『데미안』을 쓰던 시기(1917~1919)의 유럽은 겉으로는 여전히 문명국이었다. 전기가 도시를 밝히고 철도가 대륙을 연결하며 과학은 자연 정복을 약속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은 이 모든 것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이성과 진보의 탑이 인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죽이는 기술로 변모한 순간이었다.


19세기 유럽의 세계관—이성을 통한 진보, 과학의 해방, 기독교 도덕의 기초—은 전쟁으로 동시에 붕괴했다.

이성은 살육의 도구가 되었고, 과학은 무기가 되었으며, 교회는 침묵하거나 전쟁을 축복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 선언은 이 시기에 현실이 되었다. 신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신이 더 이상 삶의 의미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인식이었다.


신이 죽은 뒤 무엇이 인간을 이끌 것인가?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이 질문들 앞에서 유럽은 침묵했다.


외부 권위(교회·국가) 대신 내부를 바라보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제도화된 종교의 자리에 신비주의, 동양 사상, 영지주의, 개인적 체험이 들어섰다. 신은 인간 내부 깊숙이 숨어 있는 것으로 재해석되었다.


전쟁은 개인이 집단 속에서 쉽게 지워질 수 있다는 공포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남겼다.





『데미안』은 바로 이 아브라삭스적 세계관을 문학으로 구현한다. 데미안은 싱클레어에게 선한 아이가 되라고, 착해지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직 “너 자신이 돼라”라고 한다.


싱클레어는 처음에 밝은 세계(가정·학교·도덕)와 어두운 세계(폭력·욕망)를 분리해 산다.

빛의 세계에 속하고 싶으면서도 어둠에 끌린다.


데미안이 전하는 카인 재해석은 아브라삭스적 사고의 직접적 표현이다. 카인은 악인이 아니라 기존 질서에 순응하지 않는 인간이며, 아벨은 착하지만 약한 인간이다. 선과 악이 뒤집히고, 중요한 것은 선·악이 아니라 자기 충실성이다.


작품의 핵심 장면에서 아브라삭스는 이렇게 등장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먼저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라삭스다.”『-데미안』p122


" 아브라삭스는 훨씬 더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하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성의 이름쯤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이 결합."

-『데미안』p124


싱클레어는 더 정직해지기 위해,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숨기지 않기 위해 성장한다.

구원은 천국 티켓이 아니라 자신을 속이지 않는, 자기 안의 신성과 괴물을 동시에 인식하는 상태다.

그래서 이 소설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위험한 책이다.


독자에게 묻는다.

너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착한 인간인가, 아니면 너 자신인 인간인가.


『데미안』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낡지 않았다. 신은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무엇을 믿어야 할지 모르는 시대를 살고 있다.


당신은 당신 안에서, 당신의 눈으로 당신을 바라보고 있는 아브라삭스를 느끼고 있는가.


나는 종이에 적었다. "한 인도자가 길을 잃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어둠 속에 서있습니다. 한 발자국도 혼자 디딜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데미안』p172


사람들은 쓰레기를 던지듯 죄의식 없이 평가와 칭찬을 던진다.

그것이 진짜 나의 것이 아니어도, 내가 그들 속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나는 쉽게 아파하고 쉽게 기뻐했다.


내게 주어진 틀에 맞춰 살아야만 건강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믿으며, 나는 오랜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엄마가 되고 나서, 나는 다시 나와 닮은 아이들을 이 세상으로 내보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갑옷과 창을 쥐여줄 수 없다.

대신, 열 살의 싱클레어가 겪었던 것과 비슷한 성장통을 아이 역시 겪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인다.

내가 데미안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저 곁에서 기다리고, 기다리고, 지켜보기로 한다.


아브라삭스

아브라식스 Abraxas Gnostic Amulet (2~4세기 로마 제국)

수탉의 머리, 인간의 몸, 뱀다리를 지닌 anguipede(뱀다리 신) 형상의 아브라삭스는 고대 영지주의에서 빛과 어둠, 하늘과 지하, 선과 악을 동시에 품은 통합적 존재로 여러 신성과 원리가 하나로 합쳐진 존재를 상징한다.

수탉의 머리, 인간의 몸, 뱀다리를 지닌 anguipede 형상의 아브라삭스는 태양과 각성, 보호와 힘, 변화와 지혜를 동시에 상징한다. 오른손의 채찍은 권능을, 왼손의 방패는 보호를 뜻하며, 방패의 IAO는 야훼를 가리키는 영지주의적 신명이다.


이 이름이 숫자값 365를 가진다는 점에서, 아브라삭스는 ‘1년 내내의 보호’를 의미하는 통합적 존재로 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