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하인리히 하이네

프란츠 크로머 = 알폰스 베크? (민음사 p. 95)

by 설기

안갯속에서,

그리고 하인리히 하이네


알폰스 베크에 대한 묘사.

"그가 다른 모든 후배한테나 나한테나 늘 비꼬는 듯한 말투를 쓰고 아저씨처럼 군다는 것 말고는 그는 곰처럼 힘이 세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 하숙집 주인도 꼼짝 못 하게 제 손안에 놓었다는 것이다. 그는 김나지움 학생들 사이에 떠도는 많은 소문의 주인공이었다." (p. 95)


이는 프란츠 크로머를 떠오르게 한다.

"우리보다 큰 아이가 왔다. 열세 살쯤 된 억센 사내아이, 그 애 아버지는 술꾼이었으며 온 가족이 악명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애가 무서웠다. 그 애는 벌써 어른 티가 났고 젊은 직공들의 걸음걸이와 말투를 흉내 냈다."(p. 17)


어린 시절에 싱클레어를 위협했던 프란츠가 학교생활을 하는 그를 찾아온 것처럼 알폰스 베크가 나타났다.



알폰스 베크 왈.


"자아, 어디 내기해 볼까, 너 시를 지었지?"
“사람이 이렇게 안갯속을 걷는다면, 이렇게 가을 생각에 잠겨서 말이야, 그럼 뭔가가 있는 거야. 그럴 때는 시를 즐겨 짓지. 난 벌써 알아. 물론 죽어 가는 자연에 대해 그리고 자연과 닮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시를 짓지. 하인리히 하이네를 봐.”


싱클레어 왈.


“난 그렇게 감성적이지 않아.” (p.95)



안개처럼 먼저 떠오른 한 편의 시


[데미안]은 헤세가 43세 때 발간했는데 이 장면을 읽는 순간, 나는 헤세가 29살 때에 발표한 시〈안갯속에서〉가 먼저 떠올랐다. 우연하게도 그 시는, 내가 살아오면서 유일하게 좋아했고 외웠던 시이기도 했다.


학교로 돌아온 싱클레어도 사람들이 자신을 별로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도 느끼면서도 자신을 결코 사랑하지 않았다. 싱클레어가 처한 상황도 안갯속에 갇힌 것과 별반 다르지 않는데 왜 그는 하인리히 하이네를 언급했을까?


헤세의 〈안갯속에서〉


안갯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덤불과 돌은 모두 외롭고

수목들도 서로가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나의 생활이 아직도 밝던 때엔

세상은 친구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지금 안개가 내리니

누구 한 사람 보이지 않는다.


모든 것에서. 어쩔 수 없이

인간을 가만히 격리하는

어둠을 전혀 모르는 사람은

정말 현명하다 할 수가 없다.


안갯속을 거닐면 참으로 이상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고독하다는 것

사람들은 서로를 알지 못한다.

모두가 다 혼자이다.


29살 헤세가 썼던 이 시만으로도 싱클레어를 상황을 충분히 이야기할 수 있었다.

짙고 짙은 안갯속을 걸어본 사람들이라면 그 외로움과 불안함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의 시


1797–1856, 독일 시인, 에세이스트, 저널리스트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빛이자, 동시에 낭만주의를 가장 날카롭게 해체한 인물이다. 아름다운 서정과 냉소적 아이러니를 함께 지닌, 모순의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으로 [노래의 책]은 그의 60% 이상이 사랑에 관한 시다.


"물론 죽어 가는 자연에 대해 그리고 자연과 닮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시를 짓지. 하인리히 하이네를 봐.”



[노래의 책] 2판 머리말

나는 이 [노래의 책]을 겸손한 마음으로 양해를 구하면서 독자들에게 내놓는다. 정치와 신학과 철학 분야에서의 내 글들이 이 시들이 지닌 약점들을 어느 정도나마 보충해 줄 수 있기를 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시적인 글들이 나의 정치적, 신학적, 철학적 글들과 동일한 생각에서 비롯되었으며, 한쪽에 대한 갈채를 모두 거두어들이지 않고서는 다른 한쪽을 비난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해야 하겠다.


오 그대 신들이여! 내게 젊음을 남겨 달라고 그대들에게 부탁하지는 않겠지만. 젊음의 미덕은 사심 없는 증오와 사심 없는 눈물은 내게서 빼앗아 가지 말기를! 질투심 때문에 젊은이들에게 악을 쓰고 호통치기 좋아하는 늙은이도, 허구한 날 좋았던 옛날 타령만 하는 풀 죽은 불평꾼도 되게 하지 말기를. 젊음을 사랑하고, 노년의 쇠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젊음의 놀이와 위험에 가담하는 늙은이가 되게 해 주오! 내 목소리는 떨리고 씨근거려도 좋으니 내 말의 뜻만은 대담함과 싱그러움을 잃지 않게 해 주오!


어제 그녀는 아름다운 나의 여자 친구는 장밋빛 손가락으로 내 곱슬머리를 펴주면서 연민과 악의가 뒤섞인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넌 내 머리에서 하얀 머리카락 몇 가닥을 발견했지?


태양은 아직 아름답게 빛나지만

결국에는 질 수밖에 없어! '


(열린 책들 [노래의 책] p. 13~14)


그의 책 속에서 죽어가는 자연에 대해 그리고 자연과 닮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지은 시는 거의 없지만 그가 제2판 머리말의 말미에서 강조한 부분(2행)을 알 수 있다.


이 머리말을 읽고 나서 나는 오히려 그가 사랑에 대한 시를 지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세상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차갑고도 객관적이었다. 그런 시선 속에서 어떻게 그렇게 뜨겁게, 그렇게 아프게 사랑을 노래할 수 있었을까. 그의 시는 ‘시’라는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작품들은 산문으로 읽어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아름다웠다. 나는 그의 사랑을 훔쳐보는 방관자가 된 것 같았고, 때로는 그의 일기를 몰래 읽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리고 또 어떤 순간에는 그 시대를 살아가던 한 지성인의 고통과 풍자를 엿보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베크의 말에 공감할 수 가 없었다.



헤세가 하이네를 어떻게 봤을까?


헤세는 젊은 시절(1890년대 초반, 15~18세 무렵) 하이네의 시를 열정적으로 탐독했다고 한다. 특히 초기 하이네의 서정적·낭만적 사랑 시에 빠졌지만, 나중에는 하이네의 아이러니·풍자·현실 비판 측면을 더 높이 평가하게 된다. 헤세는 하이네를 단순히 '낭만적 실연 시인'으로 치부하지 않고, 낭만주의를 넘어선 현대적 지성인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헤세는 낭만주의를 허무하게 만들어 버리는 장치로 하이네를 언급했던 것 같다. 대부분 뜨겁게 뜨겁게 사랑했고 사랑에 대한 시를 썼던 그가 결국 청춘과 자연에 대한 시를 지었다는 것은 싱클레어에게 어떤 열정도 별것이 아니게 됨으로 그 쾌락을 즐기자는 설득의 장치였다. 하지만 헤세의 참뜻은 하이네의 시와 글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으로, 그가 지성인으로서 날카롭고 열정적이었다는 것으로 돌려 이야기한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헤세가 이런 하이네를 싱클레어에게 보여준 건, 결국 "너도 하이네처럼 돼라"는 메시지 같았다. 감상적 낭만에 빠지지 말고, 뜨거운 사랑·고통을 느끼되 그걸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아이러니로 비틀고, 예술·각성으로 승화하라는 뜻으로 해석하기로 한다.




알폰스 베크 왈.

"자아, 어디 내기해 볼까, 너 시를 지었지?"
“사람이 이렇게 안갯속을 걷는다면, 이렇게 가을 생각에 잠겨서 말이야, 그럼 뭔가가 있는 거야. 그럴 때는 시를 즐겨 짓지. 난 벌써 알아. 물론 죽어 가는 자연에 대해 그리고 자연과 닮은 잃어버린 청춘에 대해 시를 짓지. 하인리히 하이네를 봐.”


싱클레어 왈.

“난 그렇게 감성적이지 않아.” (p.95)


프란츠가 그랬던 것처럼 알폰스 베크가 오만함으로 던지는 말들은 싱클레어에게 또 다른 세계로의 유혹이었다. 감성적인 것은 나약한 것이라는 본능 같은 거부감은 프란츠에게 했던 거짓말을 떠오르게 한다.

하인리히 하이네처럼 낭만주의 시를 써도 결국은 청춘과 생에 대한 아쉬움과 한탄을 노래했다고 하는 것은 낭만주의에 대한 허무주의를 나타낸다.


" 그럼 좋도록 해! 그렇지만 이런 날씨에는, 내 생각에 말이야, 술 한잔 아니면 그 비슷한 것이 있는 조용한 장소를 찾는 게 낫겠어. 같이 가지 않겠어? 나는 지금 아주아주 외롭거든. 싫은 거야? 네가 굳이 모범생이고자 한다면 이봐, 너를 유혹할 마음은 없어."


"맹세할 수 있어?"

"그럼 말해. 하느님을 걸고 목숨을 걸고 맹세한다고."


결국 그 시절에 가장 지키고자 하는 것들을 자극하고 스스로 파괴하게 한다.


란츠 크로머가 싱클레어에게 '두려움'을 통해 어둠을 알게 했다면, 알폰스 베크는 '쾌락과 방종'을 통해 어둠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이게 했다.


"베크는 즐겁게 내 말에 귀 기울였다. 마침내 누군가가 내 말에 귀 기울이고 그에게 내가 무언가를 주었던 것이다. 그가 내 어깨를 두드렸다. 나를 굉장한 녀석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하고 하고 싶고 뭔가를 전하고 싶은 고이고 고인 욕구를 실컷 쏟아 내는 기쁨에,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연장자에게 다소 인정받는다는 기쁨에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가 나를 천재적인 멋들어진 녀석이라고 불렀을 때는 그 말이 감미로운 독주처럼 영혼 속으로 번졌다. 세계가 새로운 세계로 불탔다. 생각들이 수백 개의 철철 솟는 샘에서 나와 흘러갔다. 속에서 정기와 주정의 뜨거움이 활활 타올랐다.


그리고 베크는 나더러 사랑의 모험에 대해 무조건 털어놓으라고 했다. "(p96~96)


선배나 어른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인정욕구'가 어떻게 낡은 관습과 가짜 열정을 대물림하게 만드는지, 그 무서운 체계를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 헤세가 말하고자 했던 가짜 열정과 사랑과 낭만주의에 대한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싱클레어는 진짜 낭만주의를 모르거나 하이네를 잘 몰랐기 때문에 베크와 동행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베크와 함께 술을 마신 이후, 싱클레어는 집과 학교라는 질서로부터 이탈하여 방탕한 생활을 즐긴다. 이는 데미안이 원했던 '자기 자신으로 가는 길'과는 다른, 일종의 '자아 포기'에 가까운 도피였고 베크는 싱클레어에게 "너도 결국 우리와 같은 부류야"라고 말하는 거울이 된다. 싱클레어는 이 거울 속에서 자신의 추악하고 망가진 모습을 발견하며 지독한 자괴감을 느끼게 된다.



헤르만 헤세와 하인리히 하이네의 관계는 문학사적·정신적 영향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 두 사람은 시대가 약 80년 정도 떨어져 있어(하이네 1797~1856, 헤세 1877~1962) 직접 만날 수 없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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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낭만주의 대표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그의 삶과 시.


독일 낭만주의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불리는 하인리히 하이네는, 아이러니하게도 낭만주의를 가장 아름답게 노래하면서 동시에 가장 날카롭게 해체한 시인이었다. 그는 1797년 뒤셀도르프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났다. 나폴레옹 치하의 독일에서 성장한 그는 일찍이 자유와 혁명의 공기를 마셨고, 그 감각은 그의 문장 속에 오래 남았다. 법학을 공부했지만 그의 진짜 언어는 법전이 아니라 시였다.


젊은 하이네는 사랑에 번번이 실패했다. 사촌 아말리에 대한 연정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 좌절은 그의 대표 시집 [노래의 책]으로 승화되었다. 이 시집에서 우리는 한없이 섬세하고 투명한 사랑의 고백을 만난다. 그러나 그는 울면서도 웃고, 고백하면서도 그것을 비틀어버린다. 감정은 순수하지만, 시인은 순진하지 않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하이네는 전통적인 낭만주의자들과 갈라선다.


[노래의 책]에 실린 많은 시들은 이후 로베르트 슈만과 프란츠 슈베르트 같은 작곡가들에 의해 가곡으로 탄생했다. 특히 "로렐라이"는 독일 서정시의 상징처럼 자리 잡았다. 맑고 단순한 운율, 반복되는 리듬, 그리고 어딘가 설명할 수 없는 비애. 그의 시는 읽는 동시에 노래가 된다. 그러나 그 노래의 끝에는 늘 환멸이 기다리고 있다. 사랑은 이상으로 빛나지만, 현실은 차갑게 식어 있다.


하이네의 삶은 시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사회적 제약을 겪어야 했고, 검열과 탄압 속에서 글을 써야 했다. 그는 결국 1831년 파리로 망명한다. 그곳에서 그는 독일을 그리워하면서도, 독일의 보수성과 민족주의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말년에 그는 척추 질환으로 거의 8년간 침대에 누워 지냈다. 그는 그 공간을 ‘매트리스 무덤’이라고 불렀다. 육체는 점점 쇠약해졌지만, 문장은 오히려 더 맑고 투명해졌다. 절망 속에서도 그는 유머를 잃지 않았다. 신을 향해 투덜거리듯 기도하고, 자신의 고통을 비틀어 농담처럼 써 내려갔다. 낭만의 끝에서 그는 냉소를 선택했지만, 그 냉소는 차가운 조롱이 아니라 상처 입은 영혼의 마지막 방어처럼 느껴진다.


하이네는 낭만주의자이면서 동시에 근대인이었다. 그는 꿈을 노래했지만 꿈에 취하지 않았고, 사랑을 찬미했지만 사랑을 절대화하지 않았다. 감정과 이성이 그의 문장 안에서 팽팽히 맞선다. 그래서 그의 시는 지금 읽어도 낡지 않는다. 오히려 현대인의 감수성과 더 가까워 보인다.



귀향 2번 시. (로렐라이)


내 마음이 왜 이리 슬픈지

영문을 알 수 없네

옛날의 이야기 하나가

자꾸만 떠오르네


바람 서늘하고 날 저무는데

라인 강 고요히 흐르네

산봉우리 저녁 햇살에

눈부시게 반짝이네


저 위에 경이롭게 앉아 있는

너무나 아름다운 처녀가

황금빛 장신구 반짝이며

황금빛 머리카락 빗고 있네.


황금 빗으로 머리 빗으며

그녀가 노래 부르네

그 노래 선율 참으로

경이롭고 강력하구나.


그 노래 격한 슬픔으로

작은 배의 뱃사공 사로잡네.

그 사람 암초는 보지 않고

산봉우리만 올려다 보네.


결국 뱃사공과 그 배를

물결이 삼켜 버리겠지.

그리고 그건 노래를 부른

로렐라이의 소행이야.



[노래의 책]


하인리히 하이네의 [노래의 책](Buch der Lieder, 1827)은 그의 청년기 시(1817~1826년 사이에 쓴 작품)를 모아 연대순으로 정리한 시집으로, 총 237편의 시가 다섯 개의 연작 사이클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하이네의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세워준 대표작이자, 독일 낭만주의 시의 정점으로 평가받으며 생전에 13판 이상 재판된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 시집은 주로 불행한 사랑·이루어지지 못한 연정을 중심으로 한 서정시로 가득 차 있으며, 약 절반 이상(142편 정도)이 사랑의 아픔, 그리움, 배신, 환멸을 노래한다. 그러나 단순한 감상적 로맨스가 아니라, 아름다운 낭만적 이미지로 시작해 마지막에 냉소적이며 자기 아이러니적인 반전이 터지는 것이 하이네 특유의 매력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그의 뜨겁고도 냉소적인 표현에 가슴이 베일 때가 있다. 사람이 저렇게 사랑하고 아플 수가 있을까 싶어서 나의 심장이 딱딱한 건 아닌지, 한 번이라도 저렇게 뜨거웠던 적이 있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장미과 측백나무, 황금 도금으로

나는 이 책을 예쁘고 우아하게 꾸며

마치 관처럼 장식하고 싶다.

그 안에 내 노래들을 묻고 싶다. [p. 61]



내가 가진 책이 그가 부르던 노래의 관이 되어 있다. 섬뜩하지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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