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미안] 그 불타는 초록 물감

괴테. 칸딘스키 색채연구를 참고하다.

by 설기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녀를 그리고 싶었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나는 얼마 전부터 갖게 된 내 방에 아름다운 종이. 물감과 붓을 모아 들였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중에는 산화 크로뮴 그린이 있었다. 그 불타는 초록 물감이 하얀 작은 접시에서 처음으로 빛을 발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데미안. 민음사. p108]


초록 물감이 불탄다고 표현했다.

그냥 스쳐갈 수 있었다. 하지만 헤세라서 멈춰서 들여다보아야 했다.


이 한 문장은 우연한 표현이 아니다. “불타는 초록”이라는 말 뒤에는 수세기 동안 이어져 온 색채에 대한 사유가 숨어 있다.


17세기부터 활발해진 색채연구


17세기 근대 과학의 시대에 "아이작 뉴턴"은 프리즘 실험을 통해 백색광이 여러 색으로 분해된다는 사실을 밝혀내며 색을 빛의 물리적 성질로 설명했다. 계몽주의적 세계관 속에서 그는 자연을 측정과 수치로 설명할 수 있다고 믿었고, 색 역시 서로 다른 굴절률을 가진 빛의 구성 요소일 뿐이라고 보았다. 이 관점에서 인간의 눈은 빛을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장치였다. 그러나 이러한 색채론은 색을 바라보고 느끼는 인간의 경험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19세기 초 낭만주의 시대에 들어서자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저서 [색채론]에서 뉴턴의 기계적인 색채 이론에 반기를 들었다. 괴테는 색이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빛과 어둠이 만나는 경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며, 무엇보다도 그것을 지각하는 눈과 인간의 주체적 경험이 있어야 비로소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잔상 효과와 같은 시각 경험을 통해 인간의 눈이 능동적으로 색을 만들어내거나 보정한다고 보았으며, 색이 인간의 감정과 정신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지닌다고 생각했다.



20세기 초 모더니즘 예술의 시대에 이르러 "바실리 칸딘스키'는 이러한 괴테의 색채 이해를 더욱 확장하여 예술의 영역에서 색을 하나의 정신적 언어로 해석했다. 그는 색이 더 인간의 영혼에 직접적인 울림을 전달하는 힘을 지닌다고 보았으며, 색을 건반에, 눈을 망치에, 영혼을 울림통에 비유했다. 이로써 색채는 현실의 사물을 재현하는 기능에서 벗어나 순수한 정신적 에너지와 내면의 표현 수단으로 해방되었다.



18세기말에서 19세기까지 유난히 색채에 대한 연구가 활발한 이유는



근대 과학의 분석적 이성낭만주의적 주관성이 충돌하며 '빛과 색'을 세계와 자아를 연결하는 핵심 통로로 보았기 때문이다. 뉴턴이 정립한 기계적·물리적 세계관에 맞서, 인간의 감각과 정신이 개입된 '살아있는 색'을 찾으려는 철학적·예술적 시도가 괴테 등을 중심으로 강력하게 일어났다.


인공 합성염료의 발명으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한 색채를 일상과 예술에서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색의 물리적 조합과 심리적 효과에 대한 실질적인 탐구가 절실해졌다.


+크롬(Chromium)'의 어원은 그리스어 'Chroma(색)'에서 왔으며 모든 색의 근원이라는 의미를 품고 있다. 산화 크로뮴 그린($Cr_2O_3$)은 19세기 초에 발견된 안료로, '크롬'이라는 단단한 금속에서 추출한 것으로 빛이나 열, 화학 물질에도 거의 변하지 않는 강력한 내구성과 은폐력을 자랑한다.


사진의 발명으로 '똑같이 그리는 것'이 의미를 잃자, 예술가들은 사물의 형태 대신 색채가 뿜어내는 '에너지(방사)'와 '내면의 인상'을 기록하는 데 집중하게 되었다.


결국 이 시기는 색채를 단순한 물리적 현상이 아니라, 물체의 본질과 인간의 정신이 만나는 '주체적인 사건'으로 재정의하게 되었다.


괴체의 색채론과 초록


"우선 빛으로부터 우리가 황색이라고 부르는 색이 생겨났으며, 또 다른 색은 흑으로부터 생겨나는데 우리는 그것을 청색이라는 이름으로 표기한다. 이들은 만일 그것이 아주 순수한 상태에서 혼합되어 서로 완벽하게 균형을 유지하게 된다면 제3의 색을 낳게 되는데 우리는 그것을 녹색이라고 부른다." [색채론, 민음사 p. 43.]


"우리의 눈은 이 색에서 진정한 만족을 느낀다. 두 모색이 엄밀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혼합되어 하나의 색이 다른 하나의 색보다 더 두드러지지 않을 정도가 되면, 우리의 눈과 감정은 이 혼합색을 마치 단일색인 것처럼 본다. 더 이상 요구하려도고 하지 않고, 더 이상 요구할 수 도 없는 상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상주하는 방의 벽지는 대개 녹색으로 선택된다." p. 257



칸딘스키의 이론과 초록


"노랑과 파랑의 이상적인 균형을 얻는 것이 초록이다. 여기서는 수평운동은 서로 소멸한다. 원심운동과 구심운동도 소멸하며, 고요해진다. 완전한 초록은 존재하는 모든 색 중에 가장 평온한 색이다. 그것은 어느 쪽을 향해서도 운동하지 않으며, 기쁨과 슬픔, 정열 등의 여운을 만들지 않으며 그 무엇을 요구한다든가 어디로 불러내지도 않는다. 이와 같은 운동이 항구적으로 존재하지 않게 되자. 피곤한 인간과 영혼은 편안해지지만, 휴직의 시간이 지나가면 지루해진다.


절대적 초록은 마치 인간세계에서 소위 부르주아 계급에 해당한다. 즉, 그것은 부동적이고, 자기만족적이고 모든 방향에서 제한을 받는 요소인 것이다. 이 초록은 뚱뚱하고, 매우 건강해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암소와 같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되풀이해 씹는 것뿐이며 근시의 희미한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다. 초록은 자연이 일 년 중에 질풍노도의 계절인 봄을 견디어내고 자기만족적인 평온 속에 침잠해 있는 여름의 지배적인 색이다. "[예술에서의 정신적인 것에 대하여, 칸딘스키, 열화당, p. 91]



[데미안, 민음사]


"나방은 자기에게 뜻과 가치가 있는 것. 자기가 필요로 하는 것, 자기가 꼭 가져야만 하는 것, 그것만 찾는 거야!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일도 이루어지지. 자기 말고 다른 동물들은 갖지 못한 마법의 육감을 개발하는 거야!" p. 77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에 대한 이야기 말이야! 언덕 위에 십자가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은 굉장하지! 하지만 우직한 도둑들에 대한 감상적인 설교 전단용 이야기야! 도둑은 처음에 수치스러운 행위를 저지른 범죄자였어. 신은 그 모든 것을 알다. 그런데 이제 막판에 와서 마음이 누그러져 그런 개전과 회개의 징징거리는 축제를 치르는 거야! 무덤에서 두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하는 그런 회개가, 너에게 묻겠는데. 무슨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그건 또 정말 엉터리 신부님의 설교일 뿐 그 이상은 아니야. p.81~83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녀를 그리고 싶었다. 아주 새로운 기쁨과 희망을 가지고 나는 얼마 전부터 갖게 된 내 방에 아름다운 종이. 물감과 붓을 모아 들였고, 팔레트, 유리잔, 도자기 접시. 연필을 가지런히 놓았다. 그중에는 산화 크로뮴 그린이 있었다. 그 불타는 초록 물감이 하얀 작은 접시에서 처음으로 빛을 발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p.108


"크게 뜬 초록빛 도는 굳은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오른쪽 눈이 다른 쪽보다 약간 더 높이 있었다. 그런데 문득 그 오른쪽 눈이 찡긋했다. 가볍고 섬세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찡긋했다. 그리고 이 찡긋 거림 덕에 나는 그림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데미안의 얼굴이었다. p. 111



주관적인 감상


헤세가 사용한 산화 크로뮴의 자체만 보아도 의미심장한 부분이있다. 모든 색의 근원으로 변화하지 않고 단단한 금속에서 나왔다는 것은 단순한 초록색이 아니라는 의미다.

그렇다. 싱클레어가 하얀 작은 접시 위에서 처음 마주한 “불타는 초록”은 괴테가 말한 빛과 어둠의 완벽한 만남이, 칸딘스키의 정지된 평온을 뚫고 내면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순간이었다. 크게 뜬 초록빛 굳은 두 눈이 오른쪽으로 살짝 찡긋하는 그 찰나, 싱클레어는 마침내 자신을 직시한다.



데미안의 초록빛 눈은 바로 그 증거다. 오른쪽 눈이 왼쪽보다 약간 더 높고, 섬세하게 찡긋하는 순간, 싱클레어는 그림 속 얼굴이 데미안임을 깨닫는다. 이 비대칭과 찡긋거림은 단순한 묘사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 옆 십자가에 매달린 두 도둑의 이미지를 떠 오르게한다. 십자가 위의 두 도둑은 선과 악이라는 오래된 도덕적 이분법을 상징하는데 데미안의 초록빛 눈은 바로 그 둘을 동시에 바라보는 시선이다. 회개한 자와 회개하지 않은 자를 동시에 포용하는 아브락사스의 시선을 상징한다. 오른쪽은 본능에 충실한 회개의 길, 왼쪽은 죄의식에 얽매인 비회개의 길. 데미안은 둘을 모두 안고 “우린 같은 류의 인간”이라고 말한다. 죄를 두려워하지 말고, 나방처럼 마법적인 육감을 따라 자신만의 길을 가라는 초대와 같았다.



싱클레어가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녀를 그리고 싶었다”라고 시작한 여정은, 이 초록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을 보게 된다”는 결말로 완성된다. 빛나는 산화 크로뮴 그린은 괴테의 조화, 칸딘스키의 영적 진동, 헤세의 자기실현이 하나로 녹아든 색이다.



아브락사스의 색, 브라만의 색,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 각자의 눈동자에 깃든 색. 그 초록이 반짝이는 순간, 알이 깨지고 새가 나온다. 알이 깨지면서 보여주는 색상이 그 불타는 초록일 거라 생각해 본다.


문득 떠오른 생각.

싱클레어가 데미안에게 보낸 그림.

매의 머리는 황금색이었고 그 하늘은 파란색이었다.


새가 날아오르면 파란 하늘도 초록이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