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문을 열어주는 비밀번호
패스워드 (통과언어) - 비밀번호
오래전 만들어 놓은 메일 계정이 열리지 않았다. 한참을 생각해도 아이디와 패스워드가 생각나지 않았다. 그나마 현재 사용하는 비밀번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아서 비슷한 숫자로 여러 번 시도해 보았다. 메일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이런 일은 나에게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는 일이여서 항공사 마일리지로 상품을 구매하려 해도 메모장에 적어 놓은 패스워드가 맞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기기장치는 본인임을 증명해야 하는 보안 절차가 너무 까다롭게 되어 있어 패스워드나 아이디를 따로 적어 두지 않는다면 사막에서 길을 잃듯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비밀번호에 대한 이야기다. 언제부터 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현재 내가 사용하고 있는 비밀번호는 모두 동일하다. 아마도 여러 번 패스워드가 오류가 발생되는 시행오차를 거치고 난 다음에 만들어진 번호임엔 틀림이 없다. 핸드폰과 노트북 태블릿 PC 심지어 아주 작은 메일 계정이나 신규로 등록하는 웹사이트에서의 비밀번호조차도 똑같은 번호로 입력을 한다. 한 가지 비밀번호로 사용하다 보면 웬만해서 오류가 발생하지 않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보안 능력 면에서는 이렇게 한 가지 숫자로만 사용한다는 건 치명적 오류를 발생시킬 수 있다. 치명적 오류라 함이 버그가 생긴다거나 해킹에 우려라기보다는 아내나 아이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어서 비밀을 유지하는 게 어려워진다.
내가 사용하는 비밀번호는 단조롭게 짝이 없어서 누군가 그 번호에 유래에 대해서 묻는다면 심각한 고민 없이 문득 생각난 번호라고 말을 해도 믿을 것이다. 하지만 그 번호의 유래는 나름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지금보다 보안 시스템이 강화되지 않은 시절에는 대부분의 비밀번호는 숫자 4자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지금 사용하는 네 자리에 숫자는 대학교 1학년 때 나와 친하게 지냈던 여자 친구의 집 전화번호다. 그러니까 좀 더 정확히 말하면 집 전화번호에 뒷번호인 셈인데 그 여자 친구의 집 전화번호를 앞 번호는 기억을 못 해도 뒷번호를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은 내가 그 번호를 비밀번호로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통신 수단이라고 해 봤자 편지와 집 전화가 전부였기에 우리는 우리가 가진 모든 능력을 동원해 영어단어 외우듯이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통째로 암기하고 다녔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대부분의 전화번호가 일곱 자리 숫자 내지는 8자리 숫자로 이루어진 전화번호인데 이런 번호를 무려 10명에서 많게는 20명까지 외우고 다녔으니 말이다. 네 자리로 이루어진 비밀번호의 보안 능력이 점차 강화되면서 네 자리는 열덟자리 숫자와 문자로 이루어져야 보안 능력을 갖출 수 있게 되었다. 그때부터 나의 비밀번호는 친하게 지냈던 여자 친구들의 전화번호 집 번호에 조합으로 이루어져 갔다. 그러니까 현재 쓰는 여덟 자리의 숫자의 앞자리 네 자리는 대학교 1학년 때 여자 친구의 집 전화번호였고 뒷자리 네 번호 역시 다른 여자 친구의 집 전화번호였다.
그렇다고 두 여자 친구가 나의 진짜 여자 친구였으면 좋았을 테지만 열 명 채 되지 않은 여자 동기들 중에 그나마 말이 통하고 가끔씩 밥을 같이 먹었던 친구들의 번호였다. 이건 다르게 생각하면 꽤나 이상하고 해게 망측한 일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각별한 연인 사이도 아닌 친구 전화번호를 무려 30년 넘게 비밀번호로 사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난 단 한 번도리 비밀번호를 바꾸려 시도해 본 적이 없다. 지금처럼 모든 은행 업무나 관공서에 업무나 모든 웹사이트와 웬만한 통신 장비에 비밀번호도 모두 동일한 번호로 쓰고 있다. 누군가 마음먹고 내 모든 계좌를 해킹하려 든다면 아마 채 5분도 걸리지 않을 것이다. 허술한 걸로 따지면 이보다 더 허술한 게 없다. 5분도 걸리지 않을 거라는데 확신을 가지는 건 12살짜리 우리 아이들이 그새 내 비밀번호를 줄줄 외우고 있기 때문이다.
요즘은 거의 열여섯 자리에 비밀번호로 늘어나게 돼 있는데 다행히 맨 끝에 번호는 아이들의 생일로 이루어져 있다. 열 두 자리에 숫자와 세 개의 영어 문자 그리고 한 가지 특수 문자로 이루어진 이 해괴망측한 비밀번호는 그 구조적 특성에서부터 태생에 이르기까지 한마디로 내가 살아온 인생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정말로 우스운 건 언제부터인가 아내 역시 내 비밀번호로 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요즘에 은행 업무는 핸드폰 웹으로 대부분 송금을 하게 되는데 공인인증서의 비밀번호 역시 동일한 번호로 사용하고 있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도 딴 후에 혹시나 인터뷰라도 하게 된다면 아니 그거와 비슷한 경우에 누군가 나에게 왜 그런 비밀번호를 사용했느냐고 물어본다면 난 꽤나 긴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될지 모른다. 거기엔 내가 살아가며 만났던 사람들과 그리고 나의 이니셜과 나의 아이들의 생일까지 들어가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단순하게 비밀번호를 사용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래전에 사용했던 메일 계정이 안 열리는 일을 겪게 되면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니다. 거기에는 아이러브스쿨 계정도 있고 2000년도 초반 버블닷컴이 열풍이 불 때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도 있다.
내가 우연이라도 열리지 않는 매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찾아 그 메일들을 열어 본다거나 오래전에 들어가고 한 번도 찾아보지 않은 아이러브스쿨에 들어간다면 아마도 생소한 내가 거기에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가끔씩은 새로운 웹을 다운로드하여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만들어야 될 때 아 이젠 비밀번호를 좀 바꿔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 써왔던 마법과 같은 열여섯 자리의 비밀번호를 버리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하게 된다. 30년도 넘은 그리고 그 이후로 한 번도 연락해 보지 않은 여자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아직도 비밀번호로 쓰고 있다는 건 한 번쯤 심각하게 고민해야 되는 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렇다고 거기엔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그냥 또 다른 번호의 의미를 두고 찾아야만 하는 고달픔이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래 익숙함 아니 도저히 잊을 수 없는 번호들, 인장과도 같은 번호들 그건 어쩜 마법과도 같은 비밀번호인지 모른다. 인생은 살아가다 보면 이처럼 이유 없이 메어져 있는 수많은 비밀번호들이 있다.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리겠지만 누구에게나 마음 문을 여는 비밀번호도 있다. 노크를 하고 다른 사람의 마음 문을 열기 위해선 이런 익숙한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몇 마디 말로 마음을 닫아 버린 그래서 삼일째 말을 하지 않는 아내의 마음을 열기 위해서 나는 나만의 비밀번호, 아내의 마음을 열어 줄 비밀번호를 암기하고 살아간다.
30년이 넘도록 사용했던 비밀번호처럼 언제 어디서든 아주 오래된 것이라도 열리는 마법의 비밀번호처럼 내 주위에 모든 사람의 마음 문을 열어 줄 나만의 비밀번호, 그건 다가섬, 따뜻한 말 한마디, 눈과 입가에 맺혀 있는 따뜻한 미소, 숙제처럼 풀어야 하는 얽혀 관계,
우리 모두에겐 비밀번호가 필요하다.
패스워드 번역을 하면 비밀번호란 뜻인데 영어의 어원을 그대로 이야기하면 통과 말을 붙여 놓은 말이다. 그러니까 통과되는 말 패스워드 그게 번역을 하면 비밀번호인 것이다. 우리에게 패스워드가 필요하다.
통과되는 말 마음을 닫아 줄 언어가 아닌 모든 사람의 마음을 통과하게 해 주는 말 우리에게 비밀번호가 필요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