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구한 패러독스의 역사
오늘만 해도 몸이 아파 병원에 다녀왔다. 어제부터 부어오른 목과 코에서 연신 기침과 콧물, 재채기가 쏟아져나왔다. 또 다시 독감, 코로나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러다가도 병원에 가서 의사선생님을 만나면 그에 맞는 처방을 해주시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놀란 마음을 금방 쓸어내렸다.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는 참 당연한 이야기다. 진료실 한켠을 차지하는 코, 입, 귀의 해부도에 나는 얼마나 익숙해져 있었나.
매일 하던 운동은 또 어떤가. 어떤 근육을 어떻게 써야 다치지 않고 운동할 수 있는지, 이 운동을 통해 어떤 근육을 발달시켜 몸의 균형을 찾을 수 있는지. 혹여나 근육통이 올때면 받는 물리치료는 또 어떤가. 미술학원에 다니며 그렸던 수많은 인체도 마찬가지다. 일상을 조금 더 들여다보니 해부학이 꽤 여러 곳에 깊숙히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었다. 놀라웠다.
해부학자의 세계]는 바로 그 해부학이 어떻게 5000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나며 발전해왔는지, 해부학자들의 빛나는 업적을 귀한 도해들과 함께 보여준다. 인체애 대한 지식을 지금처럼 쌓게 되기까지 얼마나 수많은 연구와 희생, 투쟁이 있었는지 조금이나마 책의 서술들을 통해 짐작해본다.
우리 몸의 내부 작용은 어떻게 밝혀졌을까? 각 장기의 이름은 어떻게 붙여졌을까? 고대 이집트부터 르네상스 시대와 근대를 지나 21세기에 이르기까지, 약 5000년 동안 해부학자의 서재를 채운 책 속에는 인체 이해, 예술적 기법, 사회 변화의 역사가 담겨 있다.
[해부학자의 세계]는 유럽을 비롯해 중동, 중국, 일본에서 출판된, 역사상 중요한 해부학 책 150여 권을 모아 그 방대한 서사를 풀어낸다. 해부학이 철학에서 경험 과학으로 넘어가는 과정, 권위에 맞서는 도전과 새로운 발견은 물론, 해부 극장 설치, 시신 도굴꾼 문제와 해부 관련 법 제정, 그리고 예술적이고 적나라한 해부 그림과 인쇄술 발달, 표절 시비 등 보물 같은 이야기가 펼쳐진다. 놀라울 만큼 세밀하고 적나라하며 아름다운 해부 삽화와 함께 해부학자의 세계 속으로 빠져들어보자.
인류의 일상 곳곳에 많은 도움을 주었음에도 해부란 단어는 어쩐지 공포와 불쾌감이란 감정에서 자유롭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그로 인해 의학은 물론이고 운동, 예술, 각종 생활상에 많은 도움을 주며 인간의 삶을 윤택히 하는데 공헌해왔음에도 말이다. 해부에 대한 이 모순된 양가감정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왔다.
대부분의 학문이 그렇듯, 종교와 철학 사이 그 어딘가의 관점으로 고대의 해부학은 시작되었다. 인체가 종교적원리와 시대적 통념에 맞추어 구성된 시스템이라면 통치자들은 더 좋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통치자들은 인체를 알고 싶되, 그들이 허용가능한 선에서만 지식을 수용하고자 했다. 4원소설에서 영향을 받아 인간 역시 4개의 체액으로 구성되었다고 서술한 갈레노스이에 반대하는 미겔 세르베트의 주장이 나타나자, 그 주장은 기독교의 원리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주장이 담긴 책과 함께 화형을 당했다.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하와, 그러니까 여성이 남성과 같은 개수의 갈비뼈를 가졌고 뇌의 크기도 별반 다르지 않음이 밝혀졌을 때는 또 어땠을까.
인체에 대해 더 알고 싶은 열망과 윤리 의식 사이의 갈등도 만만치 않았다. 종교의 영향권에서 점차 벗어나며, 해부학은 경험 과학의 영역으로 인정받기 시작했다. 굴지의 해부학자들은 이제 그들의 호기심을 마음껏 탐구할 수 있었지만 합법적으로 시신을 구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해부학은 예술계에도 영향을 미쳐 더 완벽하게 인체를 재현해내기 위해 불법적으로 시신을 매수하는 일들도 꽤 벌어졌다. 범죄자, 사형수의 시신만으로 해부에 대한 수요를 감당하기란 매우 버거웠기 때문이다. 세계대전을 거치며 전쟁 포로들의 시신이 잔인하게 해부에 사용되었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될 중요한 비극이다.
현미경, 엑스레이를 거쳐 MRI까지 점차적으로 과학은 발달을 거듭하였다. 게다가 과거부터 축적된 해부지식을 활용할 수 있으니 이제 해부학을 위해 시신을 직접 해부하는 일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만큼 오기까지 존재 자체의 특성으로 인해 호기심과 충돌하며 많은 희생으로 쌓아올린, 오랜 시간 모순과 싸워온 해부학에 오늘도 감사와 경외를 함께 느낀다.
인상깊었던 아래의 말을 마지막으로 글을 마친다.
당신이 이름 모를 시체 위에 허리를 숙이고 딱딱한 메스의 칼날을 들이댈 때, 이 몸은 두 영혼의 사랑으로 태어난 존재임을 기억하라. 그는 그를 가슴으로부터 아끼고 보호한 사람의 믿음과 희망으로 키워졌다.
...
이제 그는 이 차가운 슬레이트 위에 그를 위해 눈물 한 방울 흘려줄 이 하나 없고, 기도해줄 이 하나 없이 누워있다. 그의 이름은 신만이 알 것이다. 그러나 거침없는 운명이 그에게 인류에게 봉사할 힘과 위대함을 주었음을 기억하라.
⁃ 1876년, 카를 폰 로키탄스키(오스트리아 빈 의과대학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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