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극을 경험해봐야겠다고 생각이 들었던 것은 ‘용산 참사’와 ‘그리스 비극’이라는 두 단어 때문이었다. 한동안 뉴스의 헤드라인을 모두 차지했던 2009년의 용산 재개발 현장. 당시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였지만, 재개발 진행이 결정된 구역에서 적합한 보상 없이 상인들이 쫓겨나게 되어 시작된 농성이 참극으로 이어졌다 말하던 어지러운 tv화면은 생생히 기억났다.
이 사건에 얽히는 그리스 비극도, 형식적인 차용이지만 어떤 모습으로 무대에서 구현될지 궁금했다. 특히 코러스라 하면 연극의 주인공 혹은 가수의 노래에 맞춰 추임새나 화음으로 음악을 더 풍부히 해주는 존재로 알려져 있는데, 그 유래가 그리스 비극이라는 점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배우이면서 관객, 때로는 전지적 작가의 시점에서 극의 이해를 돕는 연기자의 역할을 한다는
점, 배우들 또한 노래와 연기를 오가며 극을 진행하는 코러스로 역할한다늠 점에서 이번 극이 흥미롭게 다가왔던 것 같다.
[육쌍둥이]는 타오르는 불을 소재로 탐욕으로 인해 비극으로 내몰리는 인간과 세상을 가감 없이 이야기한다. 극의 처음부터 끝까지 불의 속성에 주목함으로써 '생존'을 위한 욕심 외에도 '인정'을 위한 인간의 욕심을 적극적으로 탐구하고, 탐욕의 불이 선함의 불로 뒤집힐 수 있는지, 동시대의 인간과 사회에게 질문을 던진다.
2009년 용산 망루에서 타올랐던 불이 현재에도 여전히 타오르고 있다는 확신으로 가상화하여, 이야기는 서울의 한 재개발 빌딩에서 불이 타오르는 것으로 시작된다. 물을 아무리 부어도 꺼지지 않던 그 불이 고물을 줍는 사내에게 옮겨 붙는다. 며칠 후, 몸이 붉게 달아오른 채 사내가 죽음을 맞이하자, 10년 전 가출했던 육쌍둥이가 고물상을 찾아온다.
작은 불씨에서 커다란 화염으로 바뀌는 인간의 선함과 탐욕을 형식이 분명한 극 구성 속에서 사실적인 연기와 양식적인 연기를 오가는 무대로 펼쳐내어 현실의 부조리를 더욱더 연극적인 상황으로 부각시킬 예정이다.
육쌍둥이의 여섯 가지 소망
육쌍둥이는 열 살이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제히 가출을 감행했다. 열 살 밖에 안된 어린 아이가 어떻게, 왜 집을 나갈 수 밖에 없었는가는 그 아비인 고물상에게 원인이 있었다. 다행히 새로이 지낼 곳은 찾았으나 그들은 고물상의 학대와 착취 속에서 스스로 자라났을 뿐이었다. 첫째는 유흥가에서, 둘쨰는 중국집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셋째는 강한 염세주의로 가상세계를 선망하는 아이로 자랐다. 넷째는 평창동 양부모의 집에 운이 좋게 입양되었고 다섯째는 술에 찌들어 세상을 떠돌았으며, 어렸을 때부터 유난히 말을 더듬고 성장이 더뎠던 여섯째만이 엄마와 집에 남아 있었다.
아버지 고물상의 죽음으로 엄마의 부름에 마침내 모두 한집에 다시 모였을 때, 그들은 생김새만 같았을 뿐 이미 너무나 제각각의 삶을 살아온 뒤였다. 단, 한가지 불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다. 각자 어린시절의 결핍과 그로 인해 비뚤어져 자란 여섯 욕망들이 자신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모른채, 뒤늦게 알게 된 고물상의 재개발 부동산에 열을 내고 있었다.
재산을 나누어 갖기 위해,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여섯째에게 한번도 지닌 적 없던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한명씩 나와 고백하는 장면이란, 물론 코믹적 요소를 가미했으나 관객에게 씁쓸한 뒷맛을 남겨주었다. 가족이기에 그간의 정에 매달리면서도, 한편으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철저히 매정해지는 장면은 여느 집안에서도 일어날 법한 일인지라, 육쌍둥이가 지닌 불이 비단 그들만의 것이 아닌 것 같아 공감이 되기도 했다.
불이 부르는 삶 혹은 죽음
불은 극을 관통하는 상징적 존재로, 육쌍둥이가 태어나면서부터 지니고 있던 것이자 결국 서로를 죽게 한 이유가 된 중요한 매개로 등장한다. 아버지가 고물을 얻기 위해 향했던 재개발 철거 현장에 번졌던 불, 고물상에게 옮겨붙어 그를 죽게 한 불, 고물상이 엄마를 해하려 하자 그를 말리다 막내에게 퍼진 불. 마침내 그 불은 아버지의 유산을 도화선으로 육쌍둥이에게서 더 달아오르다, 꺼지지 않는 불로 괴로워하던 막내-그리고 그를 바라보던 엄마에게 까지로 번져 붙으며 결국 모두를 잠식하고 만다.
옛 그리스 신화에서 불은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이롭고자 신에게서 훔쳐온 신성한 존재로, 인간의 번성을 불러온 것이라 상징된다. 프로메테우스는 그로 인해 절벽에 매달려 까마귀에게 살점을 쪼이는 형벌을 받게 되었을 정도로 탐욕스럽고 비극적이기 보다는, 닿을 수 없을 만큼 고귀한 존재였다. 극에서 말하는 불이 신화에서 모티프를 가져온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이 잠시 들었다.
태초에 인간에게 이롭도록 전해진 존재가 스스로 해를 입히는 위험한 것이 된 데에는 결국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재개발을 통해 이득을 보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 자식을 보살핌이 필요한 존재가 아닌 그저 소유물로 취급했던 아비의 욕망. 조금이나마 아비에게 자식으로서 인정을 바랐고, 그의 재산을 탐냈던 쌍둥이들의 욕망과 그 모두를 없애서라도 재산을 차지하려했던 막내와 엄마까지.
불은 여기 저기로 옮겨붙었다고 표현되었으나, 어쩌면 그들 마음 속에 먼저 있던 불이 또다른 불을 끌어당겨 안았다고 볼 수도 있다. 모두를 태우고서 또 어디로 향해 떠났을지 모를 그 불을 모두 조심하세요, 라고 외치듯 온몸을 오그리며 타들어가던 엄마의 표정은 또 얼마나 괴로워보였는지. 위험하게 몸집을 불려가며 조명이 완전히 꺼질 때까지 일렁이던 마지막 장면의 불이 주었던 경고와 울림을 기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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