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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행복 한바구니 Nov 10. 2023

군대 시절, 흐느낀 사수

신뢰의 시작은...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했다. 시력 문제로 2급 판정을 받았다. 대학생활 1년 후 육군에 입대를 했다. 

나보다 먼저 군대에 입대를 한 친구들이 휴가를 나오면 늘 자신들의 군 생활이 제일 힘들고 어려웠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자신의 '백'이 좋아서 좀 더 좋은 부대로 풀려 갔다느니 하면서 은근 뒷배를 자랑하곤 했다. 백도 돈도 없던 나는 애써 그들을 무시했다. 하지만 그들이 부럽기도 했다. 


나는 기도했다. 이왕 병역의 의무를 다할 것이라면 농땡이 부리지 않고, 제대로 고생을 하면서 인생을 배울 수 있는 곳으로 보내달라고 말이다. 기도는 신속히 이루어졌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교육을 받으면 '거의' 후방에서 복무할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최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철원의 해골이 그려져 있는 부대, 바로 백골부대.


백골부대의 해골 조형물 / 사진 출처 : 육군 블로그 <아미누리>


내가 부대의 막내로 전입신고를 할 무렵인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했다. 우리 부대는 즉시 5분 대기조를 가동하고 부대를 상시 전투 대비태세로 전환하는 한 편, 우리의 머리카락과 손톱, 발톱 조각을 봉투에 넣고 유서를 적은 편지를 동봉하여 행정반으로 제출했다. 상부에서는 전 병력이 완전무장을 한 채 취침에 임하도록 명령을 하달했다. 그날 저녁, 내무반의 불이 꺼지고 한 참의 시간이 지났지만 제대로 잠에 빠져드는 전우들은 거의 없었다. 대신 여기저기서 조용히 흐느끼는 소리만이 칡은 같은 밤공기를 채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튿날부터 우리는 밥 먹는 시간만 제외하고는 박격포 사격훈련과 전투체육으로 일과를 이어나갔다. '오늘 흘린 땀방울이 전투 시 핏방울을 대신한다'라며, 훈련의 강도를 높여갔다. 위로 병장에서부터 아래로 이등병에 이르기까지 입에 단내를 맡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피로감이 한계까지 차오를 무렵, 아이러니하게도 부대 내에서 얼차려 하는 시간이 사라졌다. 얼차려 담당 고참들도 힘들었는지 점호 후에는 바로 곯아떨어졌다. 덕분에 계급 낮은 후임병 전우들은 불안하지만 멀쩡한 몸으로 숙면을 취할 수 있었다.


박격포 발사 장면 / 사진 출처 : 위키 백과


북쪽에서 김일성 사망으로 인한 내부의 불안 원인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남침을 강행할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돌았다. 잠시 평화롭던 부대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부대는 평소보다 더욱더 포사격 훈련을 강화하고 횟수를 늘려갔다. 다시 피로가 쌓이게 되면서 부대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졌고 대신 누군가를 향한 분노로 가득 찼다. 전쟁이 나면 북한 놈들을 가만두지 않겠다며 이를 갈아댔다. 


저녁이 되면 순번을 정하여 외곽으로 야간 근무를 나가야 했다. 나는 이등병이었기에 당시 상병인 사수와 함께 외곽 보초근무를 서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수가 문제였다. 부대 내에서는 성질 사납고 인성이 무개념인 상병으로 악명이 자자했다. 소문에 의하면 후배들을 대할 때마다 욕으로 시작하여 욕으로 끝났고, 후임병에게 포와 관련하여 기습적으로 물어보기도 하며 이때, 대답을 제대로 못 하면 인정사정없이 갈구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같은 쫄따구들은 알아서 피해야 했다. 보초 당일 잠이 오지 않았다. 후배들이 이 사수와 보초를 서는 동안 당했던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 기억나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재수가 없었다. 하필 이 사수라니!


근무시간이 되어 빠르게 전투복과 총, 탄창을 배급받고 사수를 따라 근무지로 향했다. 근무지가 꽤 멀리 있었기 때문에 가는 동안 사수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수는 기습적으로 포사격 매뉴얼과 거리 계산법, 소총 조립법 등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하였고, 나는 깨질 것을 대비해 열심히 외워 놓았기 때문에 요리조리 잘 피해 갈 수 있었다. 사수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화가 난 것 같기도 하고 감탄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근무지에 도착하여 전 근무자들과 교대를 하고 우리는 각자의 위치를 잡고 야간 경계근무를 서기 시작하였다. 전 근무자들의 불빛은 서서히 멀어지더니 이내 언덕 아래로 사라졌다. 나는 '이제 죽었다'라고 생각하고 바짝 긴장했다. 동기들이 이 사수에 대해 이야기해 준 것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무슨 꼬투리를 잡아 얼차려를 줄까 하고 걱정하기 시작하니 점점 정신이 유체이탈하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정적의 시간이 흘렀다. 2시간의 근무시간은 후임병인 나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 길게 느껴졌다. 사람 여럿을 잡아도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지옥의 시간. 얼마나 긴장하였던지 머리에서 목으로, 그리고 등으로 땀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끄윽, 흑흑."

"...?"

"으으흑."

"... "


뒤쪽에서 근무를 서던 사수가 갑자기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용히 우는 것 같았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소리가 커지며 처절하게 다가왔다. 얼마나 서럽게 울던지 듣는 내가 다 안타깝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렇다고 뒤를 돌아보았다가는 뒤통수에 불똥이 튈 것 같아서 자세를 잡은 채로 꿈쩍도 하지 않고 귀만 열어 놓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사수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큰 소리로 관등성명을 외치려던 찰나, 사수가 조용히 시키더니 자기 곁으로 오라고 했다. 나는 영문도 몰라 바짝 긴장했으나 선임병이 오라고 하니 신속하게 튀어가 선임병 곁에 섰다. 선임병은 한동안 말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어둠이 짙었음에도 사수의 얼굴에 눈물의 흔적이 눈에 들어왔다.


"군대에 오기 전에 나는 중국집 주방장이었어."


사수는 자신의 짧은 가방끈으로 인해 고등학교 졸업 후 중국집에서 힘들게 일하게 된 것부터 시작해 마침내 주방장까지 오르게 된 과정까지 천천히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었다. 이곳 철원의 부대에서 군 복무를 잘 마치고 나면 다시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만의 중국집을 열고 싶었다고 한다. 이제 1년 정도만 잘 견디면 고향으로 가서 중국집 사장으로 멋지게 살아갈 꿈만 꾸고 있었는데, 갑자기 김일성 저 XX가 죽게 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지경에 이르렀다면서, 그것이 너무 화가 나고 슬퍼 자기도 모르게 울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일변 사수가 부럽기도 하고 언제 사수가 사이코로 변할지 몰라 바짝 긴장한 채 자동으로 말끝마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사수의 이야기가 끝나자 기적이 일어났다. 사수는 지금까지 나처럼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공감해 준 사람이 없었다며, '너무 고맙다'라고 했다. 나는 황당했다.


'이게 갑자기 뭔 말이지? 이 XX 지금 내가 어떻게 나오나 떠 보는 것 같은데?'


우려와는 달리 근무시간이 끝날 때까지 사수는 나를 배려해 편히 쉬도록 해 주었고, 끝나고 가는 동안에도 군 복무 기간 동안 알아두면 좋을 꿀팁과 우리 부대에서 피해야 할 선임병들과 그 사람들의 특성까지 모조리 알려주었다. 이 근무 후 사수는 다른 후임병들과 나를 달리 대해 주었다. 다른 후임병들에게는 여전히 개사이코로 군림하였지만, 나를 대할 때는 천사가 따로 없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먼저 다가와 이야기도 해 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TV에서 군 관련 예능 프로그램이나 드라마가 나올 때면 가끔 이 선임병이 떠오른다. 

무사히 제대를 하고 고향으로 내려간 그 선임,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궁금하다. 중국집은 성공적으로 오픈을 했는지, 소원대로 사장님이 되셨는지 모르겠다. 같은 동기들에게도 고문관 소리를 들어가며 갈굼을 당했던 이 사수. 하지만 뒤로 돌아서서는 고릴라처럼 생긴 얼굴에 억지스러운 웃음을 지어주며 내게 파이팅을 외쳐주곤 하였다. 


나이는 나보다 한 살이 많았으니 이제 이 사람도 머리가 희끗희끗하겠지. 그 당시에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사실 그 고참은 후배들을 미워하진 않았던 것 같다. 워낙 중화기를 다루고 고폭탄을 다루는 위험한 훈련이었기에, 항상 긴장을 늦추지 말라고 후배들에게 격려를 해 준다는 것이 후배들에게 오해를 산 것 같았다. 가끔 동기들에게 들었던 얼차려 이야기도 정작 물어보면 직접 당한 녀석들은 없었다. 모두 카더라 통신이 퍼진 모양이었다. 아마도 우락부락한 외모로 인해 여러 가지 오해의 뉴스를 양산했던 것 같다.


보초지에서 말없이 흐느껴 울던 선임병의 모습이 오늘따라 그립다. 자신의 이야기에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던 나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후, 무조건 적인 신뢰의 모습을 보여주던 그 선임병. 어리숙하게 보이던 외모와는 달리 모든 일에 진심으로 임하고 완벽히 익히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본인이 익힌 것은 반드시 후배들에게 공유하여 후배들이 똑같은 실수를 하지 않도록 혹독하리 만치 훈련을 시켰다. 이로 인해 후배들은 항상 안전하게 매뉴얼대로 포사격을 실시할 수 있었고, 나중에 멋진 선임병들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릴라 같은 외모와는 다르게 여리고 순수한 마음을 가졌던 그 사수. 

어디에 계시든 건강하게, 성공한 인생 가도를 달리고 계시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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