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부터 5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밀가루와 설탕 시장에서 담합이 발생
이번 사건이 더욱 충격적인 이유는 관련 기업들이 과거에도 동일한 범죄로 처벌받은 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2006년 밀가루 담합: 공정거래위원회는 당시 8개 제분사에 대해 가격 및 물량 담합 혐의로 총 434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검찰에 고발 조치한 바 있다.
2007년 설탕 담합: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 등 제당 3사는 2007년에도 가격 담합이 적발되어 제재를 받았다.
조직적인 증거 인멸
검찰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일부 기업은 조직적인 증거 인멸을 시도했습니다. "하드디스크를 파손하라"는 구체적인 지침이 임직원들에게 하달되었으며 관련 문서와 전자 기록을 폐기하는 등 수사 방해 행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년 가까이 흐른 시점에서 동일한 구조의 담합이 재발했다는 사실은 과거의 처벌이 기업들에게 충분한 억제력(Deterrence)을 제공하지 못했음을 방증합니다. 법조계와 전문가들은 담합으로 얻을 수 있는 기대 수익이 적발 시 부과되는 과징금이나 형사 처벌의 리스크 비용보다 월등히 높기 때문에 기업들이 담합을 '남는 장사'로 인식하고 있다고 분석됩니다.
한국 시장은 제분·제당 산업이 사실상 소수 몇몇 기업의 과점이 고착화되어 있습니다. 진입 장벽이 높고 규모의 경제가 작용하는 장치 산업의 특성상, 소수의 대기업이 시장 점유율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구조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업들은 경쟁보다는 '협조'를 통한 이익 극대화를 추구했습니다.
제분 시장: 대한제분, 사조동아원, 삼양사, 대선제분, 삼화제분, 한탑 등 6개사가 시장을 분할 점유하고 있다. 이들은 원맥(밀)을 전량 수입에 의존하는 원료 수급 구조를 공유하고 있어 비용 구조가 유사하고 가격 결정에 있어 상호 의존성이 매우 높다.
제당 시장: CJ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의 3사 체제로, 사실상 3각 과점 체제가 수십 년간 유지되어 왔다. 설탕 역시 원당의 수입 가격이 제조 원가의 핵심을 차지하며 제품의 품질 차별화가 어려운 범용재(Commodity) 성격을 띠고 있어 가격 경쟁 유인이 낮다.
이러한 시장 구조 하에서 기업들은 치열한 가격 경쟁을 통해 점유율을 늘리기보다는 암묵적이거나 명시적인 합의를 통해 가격을 높은 수준에서 유지함으로써 안정적인 독점 이윤을 향유하려는 경향이 강합니다.
경제학적으로 이는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 상황에서 벗어나 협조적 게임(Cooperative Game)의 균형을 선택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과거와 달라진 2020~2025년 담합
검찰 수사 결과 드러난 이번 담합의 실행 과정은 과거에 비해 훨씬 교묘하고 조직적이며 증거 인멸까지 치밀하게 기획된 지능형 범죄의 양상을 띠고 있습니다. 과거의 담합이 단순히 사장단 모임에서 구두로 합의하는 수준이었다면 이번 사건에서는 실무 임원급에서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수립되었습니다.
특히, 가격 인상의 순서와 시기를 정하는 과정에서 '사다리 타기' 게임을 활용했다는 사실은 기업들이 담합 행위를 얼마나 가볍게 여기고 일상적으로 자행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가격 선도자(Price Leader) 지정: 담합 참여 기업들은 돌아가며 가격 인상을 주도하는 '총대' 역할을 맡았다. 한 기업이 먼저 가격 인상안을 발표하면 나머지 기업들이 시차를 두고 유사한 폭으로 가격을 인상하는 방식을 통해 시장의 의심을 피하고 자연스러운 가격 변동으로 위장하려 했다.
정보 교환: 텔레그램 등 보안 메신저가 아닌 오프라인 모임과 사다리 타기 등을 통해 인상 시기와 폭을 조율함으로써 디지털 포렌식 수사에 대비하려 했던 정황도 포착되었다.
가격 담합의 성공을 위해서는 상호 간의 점유율 침범을 막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를 위해 기업들은 판매 지역과 주요 거래처를 사전에 배분하는 '시장 나누기' 수법을 병행했습니다.
특정 지역이나 대형 거래처에 대해서는 기존 거래 관계를 존중하고 저가 입찰을 자제하기로 합의함으로써 수요처가 경쟁 입찰을 통해 가격을 낮출 수 있는 기회를 원천 봉쇄했습니다. 이는 공정거래법상 가장 악질적인 담합 유형 중 하나인 '거래 상대방 제한'에 해당합니다.
이번 수사에서 새롭게 드러난 특징 중 하나는 담합 이익을 정산하고 은폐하기 위해 금융 범죄 기법이 동원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익 균형 맞추기: 담합 과정에서 특정 기업의 매출이 급증하거나 감소하는 불균형이 발생할 경우 기업 간 신뢰가 깨질 수 있습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이들은 실제 물품 거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금액의 허위 세금계산서를 주고받는 방식으로 매출과 매입을 조작했습니다.
원가 조작: 이러한 가공 거래는 원재료 매입 단가를 인위적으로 부풀려 회계상 이익을 축소하는 데에도 악용되었습니다. 검찰은 이를 통해 약 800억 원 규모의 담합 이익이 축소 신고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는 조세 포탈 범죄와 직결됩니다.
2020년부터 2025년까지 5년 동안 국제 곡물 가격은 등락을 거듭했으나 국내 기업들은 '비대칭적 가격 결정(Asymmetric Pricing)' 전략을 취했습니다. 국제 원맥·원당 가격이 상승할 때는 이를 즉각적이고 대폭적으로 제품 가격에 반영했지만, 국제 가격이 하락하여 안정세를 보일 때는 가격 인하를 미루거나 소폭만 조정하며 막대한 마진을 챙겼습니다.
실제로 FAO(유엔식량농업기구) 식량가격지수 추이를 보면 2023년 이후 국제 곡물 가격은 하향 안정세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국내 밀가루와 설탕 가격은 고공행진을 이어갔습니다. 이는 전형적인 '그리드플레이션(Greedflation, 탐욕에 의한 인플레이션)' 현상으로 해석됩니다.
밀가루와 설탕은 가공식품 산업의 기초 소재(Basic Ingredients)입니다. 이들의 가격 담합은 빵, 라면, 과자, 음료 등 2차 가공식품의 가격 인상을 유발하는 연쇄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런치플레이션 심화: 외식 물가 상승의 주범으로 작용하며 직장인과 서민들의 점심값 부담을 가중시켰다. 이재명 대통령이 "빵값이 아시아에서 제일 비싸다"라고 지적한 배경에는 이러한 원재료 담합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슈링크플레이션 유발: 원가 부담을 느낀 2차 가공업체들이 제품 가격을 올리는 대신 용량을 줄이는 '슈링크플레이션'을 선택하게 만들었고, 이는 소비자들의 실질 구매력을 저하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곰표' 브랜드로 친숙한 대한제분은 이번 사건에서 가장 심각한 도덕적 해이를 보여주었습니다. 담합으로 벌어들인 부당 이득이 회사 발전을 위한 투자가 아닌 사주 일가의 사적 향락을 위해 유용된 정황이 검찰과 국세청 조사에서 드러났습니다.
사적 경비 대납: 회삿돈으로 사주 소유의 고급 스포츠카 수리비와 유지관리비를 대납하고 명예회장의 장례비까지 법인 비용으로 처리한 사실이 밝혀졌다.
통행세 및 부당 지원: 계열사로부터 가공식품을 고가에 매입해 주거나 받아야 할 상표권 사용료(로열티) 80억 원을 받지 않는 방식으로 오너 일가가 지배하는 계열사에 이익을 몰아주었다.
인건비 과다 지급: 경영에 실질적으로 기여하지 않는 사주 일가에게 70억 원 이상의 인건비를 과다 지급한 혐의도 포착되었다.
삼양사는 밀가루와 설탕 담합 양쪽에 모두 연루되었습니다.
경영진 구속: 2025년 11월, 담합 당시 삼양사 대표였던 최 모 씨가 구속 기소되었다.
회장 연임 논란: 김윤 삼양그룹 회장은 자회사의 대규모 담합 사태와 세무조사에도 불구하고 삼양홀딩스 사내이사 연임을 시도하고 있어 주주와 시민사회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고 있다. 이는 ESG 경영의 지배구조(G) 부문에서 심각한 결격을 의미한다.
고배당 잔치: 담합으로 인한 사회적 물의에도 불구하고, 지주사인 삼양홀딩스는 오너 일가에게 유리한 고배당 정책을 유지했다. 김윤 회장 일가는 약 113억 원의 배당금을 수령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담합 수익이 오너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구조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업계 1위인 CJ제일제당은 '리니언시(자진신고자 감면 제도)'를 적극 활용하여 법적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기소 면제: CJ제일제당은 검찰 수사 단계에서 자진 신고하고 수사에 협조함으로써 제분 및 제당 담합 혐의에 대해 기소를 면하거나 형을 감면받는 혜택을 입었다.
전략적 선택: 이는 과징금과 형사 처벌을 피하기 위한 합리적인 경영 판단일 수 있으나 담합을 주도했던 시장 지배적 사업자가 처벌을 피해 간다는 점에서 '반쪽짜리 정의'라는 비판도 제기됩니다. 또한, 함께 담합했던 경쟁사들과의 신뢰를 깨고 단독으로 빠져나가는 행태는 향후 업계 내 갈등의 불씨가 될 전망입니다.
정부는 이번 사건을 '민생 경제를 위협하는 중대 범죄'로 규정하고 가용한 모든 정책 수단을 동원해 강경 대응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2026년 2월 5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독과점을 이용해 국민에게 고물가를 강요하는 행위는 국가 공권력을 총동원해 시정하라"라고 지시했습니다.
대규모 기소: 전현직 대표이사 등 임원급을 포함해 52명을 기소하고, 이 중 죄질이 나쁜 핵심 관계자는 구속 수사하는 등 엄정하게 대처했다.
수사 의의: 검찰은 단순한 가격 담합뿐만 아니라 입찰 담합(전력 기자재 등)까지 수사를 확대하며, 카르텔 척결 의지를 과시하고 있다.
'재계의 저승사자'로 불리는 서울지방국세청 "조사4국"은 검찰 수사 결과 발표 직후인 2월 9일, 담합 업체들에 대한 특별 세무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이번 조사는 정기 세무조사가 아닌 탈세 혐의 포착에 따른 비정기 조사로 법인세 탈루뿐만 아니라 사주 일가의 자금 유용 및 편법 증여 혐의까지 정밀 검증할 것으로 보입니다.
공정위는 검찰 수사 결과와 별도로 전원회의를 개최하여 담합 기업들에게 천문학적인 과징금을 부과할 예정입니다. 현행법상 관련 매출액의 최대 20%까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어 기업들은 수천억 원대의 재무적 타격을 입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이재명 대통령은 공정위의 전속고발권이 기업 봐주기 수단으로 악용될 소지가 있다며 이를 폐지하거나 국민에게 직접 고발권을 부여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습니다.
2020년 도입된 징벌적 손해배상제(손해액의 3배 배상)가 이번 사건에 적용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법조계는 생필품 담합의 고의성이 명백하므로 민사 소송에서 징벌적 배상 판결이 나올 경우 기업들에게 실질적인 징벌 효과를 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출처
1. [밀가루·설탕 담합 파장] CJ제일제당·대한제당, 영리한 리니언시 활용법 - https://dealsiteplus.co.kr/articles/156686
2. 밀가루·설탕 어쩐지 비싸더라… 검찰 '10조 담합' 무더기 기소 - https://www.chosun.com
3. Korea toughens antitrust push as lax fines let cartels profit and persist - https://biz.chosun.com
4. 밀가루·설탕 '가격 담합'에 …법조계 "징벌적 손해배상 적용 가능" - https://youthdaily.co.kr/mobile/article.html?no=212172
5. 李 대통령이 띄운 '공정위 전속고발권' 논란 - 조선일보 - https://www.chosun.com
6. 「2026년 설 민생안정대책」 발표 - 재정경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