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수록 회사에서의 자리는 달라진다. 예전에는 단순히 맡은 일을 처리하는 위치였다면, 이제는 ‘매니저’라는 직함이 따라붙는다. 이름은 단순히 호칭이지만, 그 안에는 무겁고 보이지 않는 책임이 숨어 있다.
최근 내가 맡은 프로젝트는 단순한 기획이 아니었다. 여러 팀장들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실무협의회를 직접 이끌어야 했다. 협의회 자료를 준비하고, 일정을 조율하고, 회의록을 작성하고, 협의 완료 후 보고까지 모든 절차를 책임지는 자리였다. 말 그대로 ‘시작부터 끝까지 내가 끌고 가야 하는’ 업무였다.
회의는 예상대로 쉽지 않았다. 중간에 한 위원이 전혀 준비하지 못한 질문을 던졌다. 순간 머리가 하얘졌지만, 침착하게 대응했다. 문제를 회피하지 않고 논리를 차분히 풀어갔다. 다행히 모두가 납득했고, 결국 위원 전원의 동의를 받아냈다. 회의가 끝난 뒤 팀장은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마음 한켠이 비어 있었다. 왜 그럴까 곱씹어보니 몇 가지 이유가 겹쳐 있었다.
첫째, 몰아치던 긴장이 빠져나가면서 찾아오는 포스트 퍼포먼스 블루였다. 에너지를 쏟아부은 뒤엔 기쁨보다 허무가 먼저 찾아왔다.
둘째, 매니저라는 자리는 눈에 보이는 결과보다 문제가 생기지 않게 하는 역할이 크다. 조율과 리스크 제거 같은 성과는 금세 잊히고, 박수 소리는 짧다.
셋째, 동의를 받아낸 건 끝이 아니라 이제부터 내가 책임진다는 서명이기도 했다. 성취감보다 새로운 부담이 앞섰다.
아마 이 복잡한 요소들이 겹치며, 회의실에서의 ‘전문가로서의 나’와 퇴근길에 돌아온 ‘한 사람으로서의 나’ 사이의 간격이 마음속에 공허함으로 남았던 것 같다.
전문가로 산다는 건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결과적으로 일을 완수해도 마음은 언제나 다음 과제를 향해 떠밀린다. 성취와 허무가 동시에 찾아오는 이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우리는 다시 책임의 자리에 선다.
책임이 무겁다고 해서 도망칠 수는 없다. 다만 그 무게를 이겨내며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씩 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가 결국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