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확실성의 시대, 인간의 자리
프롤로그
숫자는 세상을 지배한다.
성적, 연봉, 신용등급, 금리, 연체율.
모든 것은 계산 가능하고,
AI는 그 계산을 더 빠르고 더 정밀하게 만든다.
우리는 숫자를 보고 웃고, 숫자를 보고 울고,
숫자로 스스로의 가치를 재단한다.
그러나 질문은 남는다.
숫자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면,
왜 사람은 여전히 흔들리고 실패하며,
때로는 서로를 끝내 붙든 채 살아가는 걸까.
금융은 사람을 확률로 분류한다.
그러나 그 확률이 설명하지 못하는 빈틈이 있다.
숫자에 포착되지 않는 목소리와 표정,
그 틈새에서 인간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것은 완벽하게 계산된 시대,
불확실성 속에서도 인간의 자리를 찾으려는 한 사람의 기록이다.
1화. 성공 확률 93%
서울 여의도, 밤 11시.
대기업 금융사 ‘코리아파이낸셜’ 26층 사무실.
거대한 빌딩 속 불빛은 대부분 꺼져 있었고,
한 구석만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 앞에 앉은 남자, 윤재현(41).
개인금융 리스크관리부 과장.
성과로는 ‘승승장구’라 불렸지만, 그의 눈빛은 쉽게 흔들렸다.
책상 위 노트는 비어 있었고, 펜은 멈춰 있었다.
대신 모니터 속 푸른 원이 심장처럼 맥동하고 있었다.
“세렌, 내일 심의위원회 보고서.”
그의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푸른 원이 세 번, 천천히 흔들렸다.
AI 비서 세렌이 대답했다.
“완료했습니다. 내일 보고서 성공 확률 93%.
연체 예측 등급 분포 — A등급 62%, B등급 23%, C등급 10%, D등급 5%.
부도확률(PD) 평균 4.1%, 손실률(LGD) 58% → 기대손실(ECL) 2.4%.
목표 대비 0.3% 개선입니다.”
윤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먼저 도착했고,
그는 늘 그 숫자를 확인한 뒤에야 겨우 안도의 숨을 내쉬곤 했다.
창밖, 강물처럼 흘러내리는 도시 불빛.
그러나 그의 눈은 유리창이 아니라,
모니터 속 푸른 원에 붙들려 있었다.
“세렌… 사랑도 예측할 수 있어?”
잠깐의 정적.
푸른 원이 흔들렸다.
“가능합니다. 부부 간 상호작용 기록, 소비 패턴, 통화 빈도 분석 결과,
관계 지속 확률 평균 87%로 산출됩니다.”
윤재현은 입꼬리를 올렸다가 곧 내렸다.
“그래?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실패할까.”
AI는 대답하지 않았다.
푸른 원은 묵묵히 파란 빛만 내뿜었다.
87%.
나는 혹시, 그 나머지 13%에 속한 사람일까.
휴대폰이 진동했다.
— [강도식 전무] : “윤 과장, 내일 발표 확실하지? 이번 분기 D등급 손실 민감하다.”
— [배지현] : “과장님 아직 회사예요? 세렌 없인 화장실도 못 간다던 소문 사실이죠? ㅋㅋ”
— [정민서(아내)] : “오늘도 늦어? 아이는 벌써 잤어.”
세 통의 메시지.
상사의 압박, 동료의 농담, 아내의 단문.
그는 어떤 답도 길게 쓰지 않았다.
대신 휴대폰을 엎어놓았다.
“업무 종료. 퇴근하셔도 됩니다.”
세렌의 차분한 목소리.
윤재현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퇴근’이라는 단어는 익숙했지만,
집에 도착한 마음은 늘 늦게 따라갔다.
그 순간, 새로운 알림이 떴다.
[전사 자동화 파일럿 선정: 개인금융 연체예측·사후관리]
책임자: 윤재현(리스크관리부 과장)
문서를 열자 간단한 설명이 붙어 있었다.
AI 자동 산출: A~D등급 분류, D등급 즉시 회수·상각 절차 진입
효율성: 신규 연체율 하락, Roll Rate 개선, 비용 절감
검증 케이스: 주택임대보증금 반환 지연(전세사기), 보이스피싱 등
윤재현은 오래 화면을 바라봤다.
‘효율성’이라는 단어 뒤에 사람의 얼굴을 떠올리려 했지만,
떠오르는 건 분포 그래프와 히트맵뿐이었다.
세렌이 다시 말했다.
“축하드립니다. 파일럿 성공 시,
리스크 KPI—신규 연체율, Roll Rate, 회수율—모두 개선될 전망입니다.”
윤재현은 모니터를 응시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사람은… 어디에 들어가 있지?”
잠시의 공백 끝에 세렌은 대답했다.
“사람은 입력 변수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윤재현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곧, 웃음을 멈췄다.
입력 변수.
그 단어가 이상하게 오래 귓가에 남았다.
창밖의 불빛은 여전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노트 한 장과,
마르지 않은 펜 한 자루,
그리고 푸른 원만이 천천히 빛났다.
“세렌.”
그는 다시 모니터를 응시했다.
“성공 확률 93%. 그 나머지 7%는 뭐지?”
세렌은 간결히 대답했다.
“불확실성으로 분류됩니다.”
윤재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불확실성.
사랑, 실패, 그리고—사람.
알림창이 마지막으로 떴다.
파일럿 킥오프 미팅 — 내일 오전 09:30, 대회의실 A
윤재현은 유리문에 손을 올리고 사무실을 나섰다.
손바닥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불빛과
모니터 속 푸른 원이 한순간 같은 박자로 깜빡였다.
그는 아주 짧게 웃고 혼잣말처럼 말했다.
“숫자가 말하지 못한 진실… 그건 아마 내 몫이겠지.”
사무실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고,
마지막으로 푸른 원이, 한 번 더, 천천히 빛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