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화 파일럿
아침 9시 27분,
대회의실 A의 공기가 유리처럼 얇게 팽팽했다.
윤재현은 스크린 테스트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태블릿을 쓸어 올렸다. 화면에 파란 그래프와 표가 숨을 쉬듯 떨렸다. 창밖으로는 햇빛이 유리벽을 타고 흘렀지만, 회의실은 조명이 낮게 깔린 수술실 같았다.
“시작하자.” 강도식 전무가 팔짱을 낀 채 말했다. 목소리는 숫자처럼 건조했다.
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첫 슬라이드를 띄웠다.
〈개인금융 채권 사후관리 자동화 파일럿〉
“이번 파일럿은 연체 위험의 실시간 등급화(A~D)와, D등급의 자동 집중관리·회수 전환을 골자로 합니다.
예측모형은 PD(부도확률) × LGD(손실률) × EAD(익스포저)로 ECL(기대손실)을 산출하고, 조기경보와 연계됩니다.”
두 번째 슬라이드가 올라갔다. 줄기가 많은 숲처럼 그래프가 빼곡했다.
“베이스라인 대비 신규 연체율 2.8%→2.5%,
Roll Rate(30→60일) 28%→21%,
회수율(Recovery Rate) 12%→15%를 목표로 합니다. Vintage 분석상 22년 상반기 코호트의 늦은 피크를 반영해 조정했으며, LGD 민감도는 담보·무담보를 분리했습니다.”
누군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뒤쪽에서 배지현이 장난스레 엄지를 들어 보였다.
“과장님, AI 마스터.” 속삭임에 몇 명이 킥킥 웃었다.
강도식 전무가 웃음을 끊었다.
“결국 비용 절감이지. 숫자로 말해.”
재현은 미리 준비한 표를 열었다. “수작업 대비 처리 TAT 23% 단축, 위탁비용 연 △2억원 예상… 다만
”그는 아주 짧게 숨을 골랐다. “민원 리스크 구간이 있습니다. 전세사기로 인한 보증금 반환 지연, 보이스피싱 등 ‘법적 책임과 도덕적 피해’가 엇갈리는 케이스는...”
“그건 법무랑 감사에서 다룰 일이고, 너는 정확도를 지켜.” 전무가 잘랐다. “정식 결과만 보고.”
회의실의 공기가 한 번 더 얇아졌다.
재현은 태블릿을 눌러 마지막 슬라이드를 띄웠다.
푸른 빛이 그의 얼굴 절반을 잠식했다.
숫자들이 피부 위로 어렴풋이 비쳤다.
그는 문장을 정확하게 끊어 읽었다.
“파일럿 적용 시… 성공 확률 91%.”
박수와 함께 회의가 끝나자 복도에선 다시 현실의 온도가 돌아왔다. 종이컵 커피의 찌꺼기 냄새, 프린터의 열, 발소리. 오상훈 대리가 어깨를 두드렸다.
“현장에선 좋아해요. 애매한 케이스 들고 밤새 토론할 일 줄어드니까. 이젠 D만 찍히면 절차 타면 되죠.”
“편하지.” 재현이 웃었지만, 금방 사라지는 웃음이었다. 편하다라는 말은 이상하게 무거웠다. 편하다는 건 누군가의 이야기가 생략된다는 뜻이기도 했다.
책상으로 돌아오자, 사내 메신저가 동시에 울렸다.
[파일럿 검증 케이스 배정]
전세사기 3건 / 보이스피싱 2건 / 소상공인 폐업 1건
세렌이 곧 이어받았다. “배정 케이스 분석 중… 완료.
전세사기 피해: D 2건, C 1건. 권고 조치—조기 회수 및 상각 검토.
보이스피싱: D 1건, C 1건. 권고 조치—조기 회수.”
재현은 모니터에 뜬 D라는 글자를 오래 바라보았다.
도면에 그어진 굵은 선처럼, 결론이 쉽게 내려져 있었다.
피해자인데도, 채무자는 채무자다… 숫자는 그렇게 말하겠지.
배지현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과장님, 뉴스 보셨어요? 전세사기 간담회 또 열린대요. 요즘 댓글 장난 아니에요.
근데 우리, 모델이 잘 맞는 건 맞잖아요? 정확도가 높은데도 욕먹을 수도… 있나요?”
재현은 창밖을 잠깐 봤다. 낮의 강물은 밤보다 밝았지만 더 차갑게 보였다.
“정확도는… 정확하지.
다만 숫자가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있어.”
그가 말을 고르듯 커서를 옮겼다.
“우리가 듣지 않는 것들이.”
잠깐의 침묵. 그녀가 낮게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죠?”
바로 그때, 강도식 전무의 메시지가 떴다.
“윤 과장. 정식 결과만. 민원 얘기 꺼내지 마.
오늘 감독원 브리핑에 숫자만 가져가.”
숫자만.
재현은 키보드 위에서 손을 잠시 멈췄다.
모니터 한가운데 푸른 원이 조용히 맥동했다. 그 빛은 언제나 같은 속도, 같은 리듬이었다.
그는 전세사기 첫 케이스의 상세 화면을 열었다.
등급 D, ECL 3.9%, 조치 권고—조기 회수.
스크롤을 내리자 입력 변수들이 촘촘히 지나갔다.
소득, 신용, 거래이력, 담보, 체납, 연락 빈도.
‘경찰 진술서’도 ‘내용증명’도, 화면 어디에도 없었다. 모형의 밖에 있는 것들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정민서] : “저녁은?”
짧은 대답을 썼다가 지웠다. 대신 화면 속 D를 오래 눌러보았다. 누르면 반짝이고, 떼면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돌아오는 글자.
그는 자신에게만 들리게 중얼거렸다.
“성공 확률 91%… 그런데 누구에게 성공일까.”
창밖의 햇빛은 기계처럼 일정한 각도로 빌딩을 쓸고 지나갔다.
회의실에서 들었던 박수 소리가 멀리서 아직 끝나지 않은 듯 잔향을 남겼다.
세렌의 음성이 다시 귓속으로 흘렀다. “다음 일정: 감독원 중간 점검 사전 브리핑. 준비하시겠습니까?”
윤재현은 모니터를 닫지 않았다.
대신 첫 케이스의 메모 칸을 열고, 아주 짧은 문장을 남겼다.
“모형 외 문서 확인 필요.”
그 문장을 쓰고 나서야 그는 의자에 등을 붙였다.
아무도 박수치지 않는 작은 동작.
숫자에는 기록되지 않을 선택.
그의 시야에서 푸른 원이 한 번 더 느리게,
아주 느리게 맥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