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장미 피는 마을' 전원주택에서 정원을 가꾸며 정원을 상상하며
정원의 식구들과 어울리며 노년의 단조로운 삶도 기록해 두고 싶다.
노년이기 때문에 따라붙는 수 많은 기억들을 반추하며 즐기는 마음으로 써야겠다.
나이들면 추억이 보석이다. 추억이 없는 늘그막처럼 삭막한 삶도 없을 것이다.
그 추억을 꺼내 본다.
산다는 것은 충격과 분노..., 양념처럼 끼어드는 슬픔이 범벅된 흙 덩어리들이다.
그 덩어리들을 쌓아가는 것이 토담이다. 평생 스스로 쌓아놓은 토담 안에 갇혀서 살았다.
죽고 싶지도 않았지만 살고 싶지도 않았다.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이다. 그런 마음으로 살아온 독백이다.
활짝 핀 장미 꽃 한 송이에 감탄하며 노년에 간신히 잡은 행복을 조심스레 즐기고있다.
솔잎을 먹으며 때로 만족을 느낀다.
토해내는 추억과 누구도 먼저 경험 할 수는 없는 노년의 이야기로
구수한 섞어 찌개를 만들어 보기로 하자.
예민하고 송곳 같은 감수성이 암이 되어 나타난 모양이다.
내가 알았다면 수술받지 않았을 것이다.
2017년.. 78세에 암이라니....
아들 며느리는 엄마를 속이더라도 수술은 받게 하는 것이 효도라고 합의를 했을 것이다.
젠장....17살 때는 폐결핵에 걸렸다....
그 진단명을 듣자 아버지는 소파에 털석 소리가 나도록 주저앉으셨다.
폐결핵은 일찍 발견하고 치료를 하면 살 수 있지만 방심하면 얄짤 없이 죽는 병이다.
그렇게 각인이 되어있던 시대였다.
지금이 딱 그런 시대에 암....일찍 발견해서 치료하면 살 수 있는 병에 걸려들고 말았다.
아버지처럼 소파에 털석 주저 않지는 않았다.
초기라니까 죽을 염려는 없다지만 죽어도 아까워해 줄 나이는 아니다.
나중에 말했지만 방사선 치료는 안 한다는 조건부 수술이었다.
수술 받고 깨어나면 깔끔한 중환자실에 이불을 폭 덮고 누워 근심스러운 가족의 눈길을 받으며
우아하게 누워있을 줄 알았다.
물류 창고처럼 넓고 휑해서 보이는 거라곤 침대밖에 없는 냉동실 같은 곳에 누워있었다.
환자복을 입었는데도 얼어 죽을 것처럼 추웠다.
가족은커녕 의사는 물론 간호사 한 사람도 얼찐거리지 않았다. 있긴 한 것 같은데
소리쳐 불러도 들리지 않을 먼 곳에서 바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사막의 선인장처럼 목이 마르고 까실까실했다.
혀는 입 천정에 얼어 붙어있다.
이럴 땐 고독감을 절절히 느껴야 하는데 물 먹고 싶다는 본능 때문에 고독과 같은
품위있는 감성 따위는 없었다.
어쩌다 생각이 난 듯이 간호사 선생이 지나간다
추워 죽겠어요....소리질렀다. 참으세요. 대답이다.
"목 말라요..."
애원했다. 물은 안 되요. 대답이었다.
물에 적신 솜이라도 주세요.
간호사가 물에 꽉 짠 솜을 갖고 와 입술 위에 놓아주었다.
솜을 질근질근 씹어도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욕설이 나오려고 했지만 입틀막....
의학 드라마로 작가 데뷔하고 의학 드라마 4년을 써서
의사와 간호사의 애환, 어지간한 의학 상식은 잘 아는 지식인이라고 자신을 평가하고 있었는데
욕이 튀어나오려고 하다니.
물론 ㅆㅂ 같은 저질의 욕은 마음 속에서도 하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몇 시간이나 지나갔을까.
모처럼 주치의와 전공의 커플이 내 침대 앞을 쌩~~하고 빠른 걸음으로 지나간다.
약이 올라 소릴 질렀다.
"어딜 그렇게 바람과 함께 사라지세요....??"
크고 쉬어터진 내 목소리가 창고 같은 중환자실에 울려 퍼졌다.
두 의사는 돌아다보더니 씩 웃고는 그냥 지나가 버린다.
드라마 속의 의사처럼 점잖게 다가와... 좀 어떠세요...수술은 잘 되었습니다....
속 뜨듯하게 한 마디 해주고 가면 어디가 덧나나....?
폐결핵에 걸렸던 17세 때는 사촌 오빠가 의사이기 때문에 입원도 하지 않고
오빠가 퇴근 길에 매일 우리 집에 오셔서 나를 보고 가시곤 했다.
폐결핵 환자는 고기를 많이 먹고 편안히 누워 쉬면 되는 병이라 매일 의사가 왕진 올 필요는 없었다.
말이 오빠지 내가 항렬이 높아 사촌 오빠들이 전부 아버지 클라스였다.
그 오빠는 자식이 없기 때문에 나를 무척 귀여워하기도 하셨지만 실은 오빠는 자기 삼촌하고 바둑을 두고 정원의 벤치에 앉아서 소고가 숯불 소금구이를 안주 삼아 약주를 드시려고 오는 것이었다.
그래도 나를 귀여워하는 오빠가 매일 오시는 게 좋았다.
26살에는 폐결핵이 재발하여 인천 연수동에 있는 폐결핵 요양원에 입원을 했다.
요양원 시스템이 일반 병원하고는 다르긴 하지만 안정시간이 끝나면
의사와 환자들이 잔디밭에 둘러 앉아 환담을 하며 즐기곤 했다.
담당 의사가 쾌활하고 털털한 성격이어서 더욱 재미가 있었다.
이 암 병동은 도대체 의사들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전에는 병원 층마다 의국이라는 곳이 있어서 의국에는
의사 한 두 명 씩은 대기하고 있어서 언제 어느 때나 의사를 만날 수 있었다.
지금은 의사 만나기가 대감님 만나기보담 더 어려웠다.
아침 회진 때 한 번 보곤 하루 왼 종일 그림자도 볼 수가 없는 게 신기했다.
간호사도 마찬가지였다.
이삿짐 센터의 트럭처럼 잔뜩 실은 밀차를 밀고 들어와 이것저것 체크하기 바쁘고
뭔가를 물으면 최대한 짧은 외마디로 대답을 하고는 사라졌다.
수술 자리가 심하게 가려워서 간호사에게 왜 드레싱을 안 해주느냐.... 물었다.
곧 해줄 듯이 덮은 거즈를 벗기고 환복 하의를 밀어 놓았는데 서너 시간이 지나도록 의사가 오질 않았다.
드레싱처럼 간단한 처치도 꼭 의사만 할 수 있는 의료행위이다.
그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술 자국은 몸서리치도록 가려웠다.
아파서는 미치지 않지만 가려워서는 미치지 않을까 싶었다.
자정이 넘어서 단념하고 거즈를 덮고 잠을 청하는데 처음 보는 의사가 나타났다.
이름표를 보았다. 외과 수련의였다.
소독솜으로 상처를 닦고 머큐롬을 바르고 거즈를 덮고 의사는 철수했다.
단 한마디도 주고받지 않았다.
파란 수술복 위에 흰 가운을 입은 의사는 아마도 수술 끝나고
쉴 사이도 없이 달려온 상황이라는 것이 짐작이 되었다.
'6시간이나 기다렸단 말이야.'
가려움 증도 지쳤는지 잠을 자고 있나 보다. 가렵지가 않았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는 할 줄 알았다..
그러나 그는 날 모른다. 몇 호실 몇 번 침대의 귀찮은 환자였을 뿐이다.
수술 받고 나면 식욕은 없기 마련이다.
간이 들지 않은 미음과 건더기가 없는 물김치 뿐인 밥상이다.
병원 음식은 영양학적으로는 우수했는지 몰라도 미각학적으로는
원시 시대 보다 못하면 못했지 나을 것 없다고 단언한다.
두 수저 이상은 먹을 수가 없었다.
하루는 늘 바람과 함께 사라지던 전공의와 간호사가 함께 들어와
깨적 거리고 있는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역시 두 수저를 먹고 놓으니까 더 먹어야 한다며 간호사가 떠 먹여주었다.
왼 친절....? 내가 안 먹겠다고 도리를 치니 내 머리를 잡고 몇 수저 억지로 밀어 넣었다.
수저를 던져버리자 5, 6알 쯤 되는 약을 강제로 쑤셔 넣기 시작한다.
내가 먹겠다고 소리 지르며 간호사 손을 쳐내었다.
내가 약을 먹는 것을 확인하고 의사와 간호사는 나갔다.
내 예민한 위는 영락없이 반응이 왔다.
소화불량에 걸려 아예 먹을 생각이 없어졌다.
그런 일이 하루 이틀이 지나가자 침대 옆에 큰 기계같은 의료기구를 들여다 놓았다.
그 의료기구에 호스를 달아 내 코에 연결 시켰다.
순식간에 코끼리가 되었다.
팔에는 대 여섯개의 바늘이 찔렀다.
링거병 스탠드에는 너 덧개의 비닐 봉다리가 거꾸러 매달렸다.
흰 탕수육 국물같이 걸쭉한 액체도 걸렸다 영양제란다.......
금식 팻말이 붙었다.
경과를 봐야 알겠지만 한 보름 금식을 해야 한단다.
물도 마셔서는 안 된다. 입안을 헹구기만 하라.
보름은 이십 일이 되었다.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물을 헹구고는 뱉어내면서 한 방울쯤 남겨 삼키고는 행복해 했다.
의학 드라마를 쓰던 30여 년 전하고는 병원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나 많이 달라졌다.
아무리 외과 수술이라고 해도 수술 전과 수술 후,
병실에서 회진 때 집도 의사의 문진이라는 것이 있었다.
영상 촬영 전 후에는 왜 찍는지 결과가 어떤지 그래서
어떻게 해야하는지를 친절하고 알아듣기 쉽게 알려 주었다.
X-레이 사진을 100장은 찍은 것 같은데 한 번도 왜 찍는지 찍고 나서
결과가 어떤지 설명을 들은 적이 없다.
모든 의학적 판단은 X-레이 필름이 했고 의사는 그 걸 보고
병명을 결정하고 약을 처방할 뿐이었다.
구태어 환자에게 알릴 필요는 없다는 주장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런 의사 선생님의 회진 분위기를 보면 왠지 놀리고 싶어졌다.
과장님부터 전공의 수련의 인턴 의대 학생들 간호사들....
한 여나믄 명을 뒤로 매달고 황제처럼 나타날 때면 엘가의 위풍당당 교향곡이라도
틀어놓고 배알하고 싶은 권위적인 풍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궁금한 걸 물어보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자기네들끼리만 아는 소리를 샬라샬라 하고는 나가버린다.
묻고 자시고 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내가 한창 때이던 신석기 시대 의사들은 차트에 기록되어 있는걸 알면서도
이것저것 물어보고 대답하는 간단한 립 서비스는 했다.
수술에 참여했던 의사가 어머니 뱃살에 기름이 어찌나 많은지
수술하는데 아주 애를 먹었다고 아들이 낄낄거리며 전해주었다.
기름덩이를 제치고 제쳐도 계속 나왔다나... 아들은 계속 놀리며 킬킬거렸다.
저희들끼리 수술하면서 짜증 반 농담 반을 섞어 버므리며 얼마나 ㅋㅋ...거렸을까. 안 봐도 비디오 아닌가.
다른 곳은 몰라도 마취가 필수인 수술방은 CC TV 설치를 반드시 해야한다니까.
나 같은 경우는 수술 시간이 4시간 걸렸다지만 상황에 따 라서는 010 10시간 이상 씨름을 해야 하는 수술도 있다. 인간의 온갖 욕망을 다 기본적인 욕망을 참으며 오로지 피와 고름 속에 파묻혀 시간을 쪼개고 살을 찢고 때론
뼈를 가르고 심장을 바꿔치기해야 하는 그들의 긴장감과 지루함 피곤함을
“아갈머리”로 쫌 풀었다고 골을 낼 것까지는 없다는 이해심으로
수술진에 항의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나도 웃고 말았다. 아들에게 한 흉이라니 뭐...별로 화가 나지도 않았다
현대의 병원은 인턴도 수련의도 전공의도 전문의도 박사님도
아주 적은 숫자로 기능적으로 엮여서 톱니바퀴처럼 돌아가는
공장이 되어버렸다는 것을 입원 며칠만에 눈치를 챘다.
인간적인 것을 주장해서는 안 되는 시대가 되었다. 머지 않아 의사도 AI 시대가 올지 모르고
AI가 의사 선생님이 되기 전 마지막 인간 의사들일지도 모른다.끝까지 인간적인 선생님이기를 바라고 싶다.
하긴 남자란 남자 의사든 남자 검사든 언제나 남자임에는 틀림없을테니까.
치료해주신 선생님과 수고한 간호사 선생들에게 인사도 제대로 못하고 퇴원을 했다.
토요일이라 당직만 있었다
주스 한 상자도 선물할 수가 없는 분위기이다.
모든 성의는 감사하나 사절하겠다는 글이 경고장 같아 마음이 썰렁해졌다.
沙漠에서의 카덴짜는 78세의 마지막 달력까지 계속되고 있었다.
2019년 12월 2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