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무엇을 수집하시나요?
심리학자들은 이처럼 괴로운 시기에 수집이 줄 수 있는 달콤한 위안에 관해 연구해 왔다. (중략) 수집 습관이 모종의 "박탈 혹은 상실 혹은 취약성"이 발생한 후 급격히 심해지는 경우가 많으며, 새롭게 하나를 수집할 때마다 수집가에게는 폭발적인 도취감을 주는 "무한한 힘의 환상"이 흘러넘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자신의 무력함을 느낄 때는 강박적인 수집이 기분을 끌어올리는 데 도움이 된다." 뮌스터버거가 지적하듯, 유일한 위험은 여느 강박과 마찬가지로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어떤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p31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의 거의 마지막 부분을 읽다가 갑자기 수집 습관이 "신나는" 일에서 "파멸적인" 일로 바뀌는 지점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챕터 1에서 본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왜 갑자기 떠올랐을까요? 같은 문장을 2~3번 정도 읽다가 갑자기 파크리트 쥐스킨트의 "향수"라는 책이 생각났습니다.
향기에 대한 맹목적인 욕망을 가지고, 향기로 존재의 의미를 찾고, 사랑을 받고자 했지만 정작 자신의 본질은 무취의 허황된 인물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그루누이. 데이비드와 참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질서를 찾겠다는 욕망을 가지고, 이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지만 자신도 질서가 없는 엔트로피의 결정체라는 것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두 개의 스토리를 보면 수집이 "파멸적인" 일로 바뀌지 않으려면 자신의 가치관과 존재의 의미를 생각의 흐름이 멈춘 '수집' 속에서 찾으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수집.
수집이라는 단어를 곱씹어 봤습니다.
그루누이는 향기를 수집했습니다.
데이비드는 물고기를 수집했죠.
나는 무엇을 수집할까?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술입니다. 그런데 술은 수집이라고 말하기에는 애매합니다. 다양한 술, 희귀한 술을 찾아다니고, 열심히 구매하지만 얼마 안 있어서 다 마셔버리거든요. 뭐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사진이나 복잡한 위스키의 향의 지도 또한 수집이라고 한다면 술도 수집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또 뭐가 있을까? 게임. 지금까지 한 사이트에서 구매한 게임만 해도 500개를 넘어갑니다. 게임은 확실히 수집한다고 할 수 있겠네요.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상합니다. 최근에는 점점 게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는데 여전히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관심이 가고, 재밌어 보이면 구매하거든요. 사놓고 한 번도 켜지 않은 게임이 이제는 200개가 넘어가는 것 같습니다.
왜? 스스로 질문해 봤습니다. 음. 술을 마시는 것은 저에게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한 세계를 직접 두 발로 돌아다니며 지도를 그리는 거죠. 내가 좋아하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러 종류의 술을 오감을 이용해 즐깁니다. 분명 게임도 이렇게 직접 경험하며 지도를 그려나가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무의미해 보이는 수집욕은 가치관과 결핍의 결합이 만들어 낸 집착의 부산물일까요. 아니면 단지 오랫동안 좋아했기에 붙들고 있는 습관 같은 것일까요.
예전에 김영하 작가님이 한 말이 생각납니다. "책은요 읽을 책을 사는 게 아니고 산 책 중에 읽는 거예요." 저도 비슷한 것 같습니다. 수집하는 목적은 쓰기 위해서입니다. 게임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고는 해도 항상 사놓은 게임 중에 무엇을 할지 고르니까요. 술의 맛과 향을 수집하는 이유도 내가 처한 이 상황에 마시고 싶은 술을 기억해 내기 위해서이죠. 제가 수집한 이런 대기자들이 많을수록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해 제 삶을 풍부하게 만들어 줍니다.
하지만 이 단계를 지나가게 되면 수집이란 더 이상 이유가 필요하지 않은 관성의 한 형태로 바뀌는 것 같습니다. 심하게는 그루누이가 향기를 수집하듯 맹목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행동이죠. 그 자체가 목적이자 수단입니다. 이러한 수집욕이 잘못된 가치관과 혼합되어 인생의 목표가 되어버리면 수집이 목적이 되어 모든 행위를 합리화하는 "파멸적인" 길로 빠지게 되는 것 아닐까요.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역사적인 수집품들을 보관하고 있는 박물관이 있겠네요. 또한 이러한 수집가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로 인정받기도 합니다. 수집품이 그 분야에 대한 수집가들의 애정과 전문성을 어느 정도 입증해 준다고 생각하거든요. 다시 말해 수집의 크기가 커지면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게 되고, 더 커지면 나뿐만이 아닌 주변 사람들도 의미를 부여하게 됩니다.
질문이 잘 못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수집을 할까?"가 아니라 "수집에 의미가 있을까?"라는 질문이 조금 더 어울리지 않나 싶습니다. 데이비드가 "인생의 의미가 뭐예요?"라고 묻자 그의 아버지가 "의미는 없어!"라고 대답한 것처럼 말이죠. 이 말이 저에게는 "너 생각하기 나름이다"라는 말로 들립니다. 데이비드가 했던 행동을 보면 '그 사람도 나와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았을까'라는 합리적 의심을 해봅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 와서 꽃이 되었다.
- 꽃, 김춘수
데이비드가 물고기에 이름을 붙였듯 수집가들도 무의식적으로 수집품들에 자신만의 이름을 붙이고 있을 것입니다. 블로그에 매주 보는 영화의 리뷰를 올릴 수도 있고, #피트위스키 #올로로소셰리 와 같은 해시태그를 붙이고 있을 수도 있죠. 모든 수집품들이 나에게로 와서 새로운 의미가 되는 순간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의식의 흐름대로 글을 적다 보니 어렴풋이 데이비드가 느꼈던 수집에 대한 감정을 정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수집은 어떤 존재가 나의 세계에 들어와 내 멋대로의 새로운 이름과 의미를 부여받는 것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마 저는 계속 게임을 수집할 것 같습니다. 또 어느 순간 술을 수집하고 있을 수도 있겠죠. 아예 새로운 것일 수도 있고요. 오히려 그 하나하나에 이름을 지어주는 것에 집중해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수집의 크기가 커져 박물관의 수준이 된다면 그때 그것이 제게 어떤 의미일지 궁금해지네요. 여러분은 무엇을 수집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