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지와 정의
서서히 우회전해서 작은 영화관 주차장으로 진입하던 순간, 운전하던 남편이 '엇!' 하고 놀라는 음을 냈다.
"왜? 왜?"
무슨 사고라도 났나 싶어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어, 아저씨들이 싸우고 있어서..."
고개를 쭉 빼고 차창 너머를 내다봤지만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주차하고 남편을 따라 진입로 쪽으로 갔더니, 차가운 1차선 도로 바닥에 시커먼 패딩을 입은 두 남자가 엉켜 있었다. 위에 있는 남자가 위협적으로 보였다. 아래에 깔린 남자는 위쪽의 남자보다 열 살이나 스무 살은 더 들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건너편 식당 앞에 중년 남자 둘이 이쪽을 구경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아저씨! 그만하세요. 말로 하세요!"
위에 있는 육십대로 보이는 남자에게 소리쳤다. 남자가 나를 쳐다봤다. 눈이 벌겋고 매서웠다.
"계속 이러시면 경찰에 신고할 거예요."
"이 사람이 안 놓는단 말이요."
무슨 소린가.
"아, 이거 놓으란 말이요!"
남자가 바닥의 노인에게 소리쳤다. 다시 보니 노인이 남자의 다리를 두 팔로 온 힘을 다해 꽉 붙들고 있었다. 뼈밖에 없는 작은 체구의 늙은 사람에게서 그런 힘이 나온다는 것이 놀라웠다. 다리를 빼려고 애쓰던 남자가 노인네가 폐지 가져간다고 이런다며 하소연했다. 파란색 용달차에 종이박스가 상당히 실려 있다. 도로 앞은 빌라 단지이다. 노인은 이 동네에서 폐지를 줍는 분이고, 외부인인 남자가 용달차로 동네 폐지를 수거한 모양이다. 폐지 내놓으라고 말다툼하다가 몸싸움까지 번진 것이다.
"할아버지, 일어나서 말로 이야기하시게요."
이번에는 노인을 다독였다. 마스크 속의 입이 웅얼거리는데 뭐라는지 전혀 모르겠다. 대신 노인의 뿌연 회색 눈이 결연하다. 절대 놓지 않으리라는. 그 눈으로 설명하지 못한 억울함을 표현했다. 대치 상황이 계속됐다. 경찰을 불러야 하나.
"아저씨가 폐지 그냥 주고 가시면 안 돼요? 그러면 놓으실 것 같은데." 남자는 그러마 대답은 없고 딴소리만 한다. 벌겋고 찢어진 눈은 이미 내놓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폐지 때문이라니. 이 사회에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은 또 무엇이 있을까?
안절부절못하는 동안 동네 분인 듯한 중년 남자가 걸어왔다. 노인을 잘 아는 듯했다. 설득하니 그제야 손을 놓았다. 아는 사람이 왔으니 더 머무르는 건 오지랖인 것 같아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저 사람 폐지 안 줄 것 같은데, 자기 현금 있어? 할아버지한테 몇 만 원 드리면 안 될까?"
"나도 현금이 없네. 그리고, 돈 주는 건 조심스럽지 않을까?"
노인의 억울한 회색 눈이 잊히지 않아 뒤돌아 보았다. 그새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 요즘 세상에 적선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 그래도 내 할아버지라 생각하고 적은 돈으로라도 다친 마음을 위로하고 싶었는데, 그저 알량한 동정심이겠지.
"저 식당 사람들은 어떻게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있어?"
"사정을 모르니까 남의 일에 나서기가 어려운가 보지."
"그래도 노인이 당하고 있는데... 할아버지가 먼저 다리를 잡은 건가?"
"아니, 더 젊은 쪽이 쓰러뜨리더라고."
뭐라고? 그러면 남자가 노인을 때렸겠는데? 우리가 볼 때만 안 그런 척했나? 아, 미리 알았더라도 동정만으론 아무도 구하지 못했겠지.
도로는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다시 평온해졌다. 구경하던 사람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내가 본 것은 싸움이 아니라,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영화를 보는 내내 무언가를 붙잡고 놓지 못하던 그 탁한 회색 눈이 떠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