엇갈림과 풍성함
퇴근시간이 지났는데도 교무실은 아직 시끌벅적했다. 채비를 마치고 들러 떡 한 쪽을 먹으며 같은 방향인 부장선생님과 교감선생님에게 어서 퇴근하자고 했다. 부장선생님은 정리하고 금방 나간다 하고, 교감선생님은 일이 조금 남아 마저 하고 간다고 했다. 내일 보자고 하고는 싸 준 떡 몇 개를 받아 들고 발걸음을 급히 옮겼다. 집까지 가려면 서둘러도 한 시간 가까이 걸린다. 날이 화창했다. 오랜만에 라디오를 들으며 가려고 FM을 눌렀다. 이 시간엔 이상순의 <완벽한 하루> 프로그램이 흐른다. 이상순 디제이의 목소리가 맑은 봄동 된장국처럼 포근하다.
햇살이 좋을 때 음악을 들으며 시골길을 운전하면 출퇴근길이라도 여행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어차피 하루 두 시간씩 길 위에서 보내야 한다면 아침엔 오늘은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설레하며, 오후엔 하루를 무사히 보낸 걸 행복해하며 편안하게 흘러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복잡한 일들이 머리를 헤집지만 않으면 말이다.
20분쯤 지났을까. 휴대폰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런. 앞에 보이는 농협주유소에 차를 멈췄다. 모두 뒤집어 찾아봐도 없다. 교무실에 두고 온 게 틀림없다. 늘 휴대폰으로 강의나 음악을 틀어 놓고 출발하는데 오늘은 그 루틴을 어겼다. 하필 라디오가 듣고 싶어서는. 늘 휴대폰은 손에 들고 주차장까지 걷는데, 놓고 왔는데도 손에 뭔가 들려 있어서 뇌가 허전하다는 걸 못 느꼈나 보다. 출발 전 한 번이라도 더 확인했더라면.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를 모두 놓쳤다. 이걸 어쩐다?
되돌아가지 않을 방법이 없을까? 차에서 내려 서성거리는데 농협 쪽에서 피부가 희고, 옷맵시가 좋은 중년여인이 나왔다. 세련되어 보이는 인상이었다. 갑자기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모르겠다. 혹시 휴대폰 좀 빌려 쓸 수 있겠느냐고 우물쭈물 물었다. 사무실에 놓고 왔는데 거기 직원이 있어서 연락하고 싶다고 덧붙였다. 그분은 흔쾌히 그러라며 내주었다. 모르는 사람인데 의심하지 않고 친절을 베풀어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만약 연결이 되면 여기서 기다리다가 만날 수도 있겠지. 둘 중 한 명이라도 아직 출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화벨은 하염없이 울리기만 했다. 업무시간이 끝났으니 그럴만도 하다. 그래도 좀 받지. 알면서도 서운하다. 이런 상황을 알 리 만무하지만.
그분이 혹시 모르니 한번 더 해보라고 권했다. 따뜻한 분이었다. 두 번이나 벨이 울리면 혹시 급한 일인가 싶어 수화기를 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품고 한번 더 걸었다. 하지만 역시 기대는 무너졌다. 내게 안타까운 표정을 보내는 친절한 부인에게 다시 허리 굽혀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차에 올랐다. 이젠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내일 아침까지 휴대폰 없이는 살 수 없다. 휴대폰이 없으면 못 산다니 이거 정상인가?
주차하고 학교로 뛰어가는 중에 공사 현장 소장을 만났다. 사정을 묻더니, "겉으론 젊어 보여도, 교장선생님도 이제 다 됐네요." 이런다. 우쒸. 교무실 문을 열었다. 교감선생님이 부장선생님 못 만났느냐고 깜짝 놀란다. 내가 나가고 나서 바로 휴대폰 들고 주차장으로 나갔었다고. 이런. 내가 너무 빨리 출발하는 바람에 그 마주침조차 엇갈렸나 보다. 이럴 땐 급한 성격이 원망스럽다. 조금만 더 천천히 걷거나, 이것저것 여유롭게 살피고 시동을 걸었더라면...
아까 휴대폰 빌려서 교무실에 전화했었다고 말했다. "어제 근무 시간 넘어서 까다로운 민원전화가 두 통이나 와서, 오늘은 일부러 안 받았거든요. 받을 걸 그랬네요." 교감선생님이 아차, 하며 말했다.
이제 좀 더 꼬였다. 부장선생님에게 전화했다. 딱 중간만큼 갔다고 했다. 그럼 집으로 찾으러 가겠다고 했더니, 거기에 멈추고 있겠단다. 많이 기다려야 할 텐데 미안하다고 했다. 자기가 휴대폰을 가지고 가서 더 미안하다고, 쉬면서 기다릴 테니 천천히 오란다. 급하면 사고 난 다고. 뭐 이런 착한 사람이 있지?
다시 차를 달려 드디어 만났다. 시간을 많이 허비했을 텐데 불편한 기색도 없이 나더러 이럴 때일수록 여유롭게 천천히 운전하라고 신신당부한다. 허둥지둥하는 내 성격을 안다. 나이는 한참 어리지만 이렇게 챙겨줄 때마다 나보다 어른 같다. 젊은 남자가 좀 깊이가 있다.
무사히 휴대폰과 함께 집에 도착했다. 짜증스럽기보다는 왠지 웃음이 났다. 몇 번이나 어긋나고서야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았다.
오늘 일이 묘하게 인생을 닮았다. 우리는 늘 미리 준비하고 두루 살피며 조금이라도 일찍 도착하려고 애쓴다. 그러면 편안하고, 남는 시간을 여유롭게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실수하고 놓쳐 되돌아가 다시 시작해야 할 때도 있다. 그래도 주변을 둘러보면 기회는 또 생긴다. 어긋나고 엇갈려 기다리고 멀리 돌아가더라도, 새롭게 다시 시작하더라도, 그 길 위에서 만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삶을 풍성하게 채워 준다. 어떻게든 결국 도착한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빨리 가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그 길을 걷느냐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