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 심은 데 콩 나고

새 학년 학부모 상담

by 솔향

3월 17일. 학부모 상담이 있는 날이다. 큰 애들을 키울 때는 고 3 때나 한번 담임 선생님을 만난 게 다였는데, 막내는 작년에 이어 올해도 새 학년 학부모 상담을 신청했다. 여러모로 부족한 아이 잘 부탁한다고, 얼굴이라도 보고 말하면 조금은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해서.


두시 반에 조퇴해서 한참 운전해 가고 있는데, 막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학교에다 영어학원에 가져가야 할 문제집을 놓고 왔다는 것이었다. 이런 걸 왜 나한테까지 말하는가. 나더러 어쩌라고. 주먹만 한 것이 울컥 치밀었다. 다시 되돌아가야 해서 속상하다고 하소연한다.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러니까 잘 챙겨야지. 정신을 어디다 두고. 쯧쯧. 니가 싼 똥은 니가 치워야지. 꼭 나한테까지 향기를 맡게 해야 속이 시원하냐?


스스로 해결하게 모른 척해야 하는데 또 마음이 약해졌다.

"지금 학부모상담 하러 네 교실 가는 중이니까 엄마가 가져다줄게."

아, 나풀거리는 검불처럼 나약한 마음이여. 어째 시간까지 딱 맞아서는.

"진짜? 엄마 학교 가? 완전 다행이다! 내 책상은 앞에서부터 네 번째고 세로로는 가운데 줄이야."

자꾸 도와주면 아이가 책임을 배우지 못한다고 학부모들에게 말하는 사람이 바로 난데, 정작 나는 제대로 실천을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은 꽁꽁 숨겨야지.


약속한 세 시 반, 4층에 있는 3학년 9반 교실 문을 노크했다. 담임선생님은 작년에 자기 반에 들어오는 역사 선생님이셨고, 그때와 달라진 점은 유부남이 된 것이라고 막내가 말한 게 떠올랐다.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초반? 아니면 삼십 대 중후반? 모르겠다. 요즘은 젊으나 늙으나 나이 가늠이 어렵다. 다만 인상이 온화하고 말투가 차분해 마음에 들었다.


아이에 대해 선생님과 두루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가 자신감이 부족해서 소외감을 느낀다는 건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막내가 주변을 잘 못 챙기고, 자꾸 뭘 빼먹고, 스스로 하는 힘이 부족하고, 미루기만 한다고 단점 위주로 걱정거리를 길게 털어놓았다. 너무 흉만 봤나? 그래도 자기주장을 전혀 못 하지는 않고, 조금 독특한 면도 있어서 걱정하는 것보다는 잘 지낼 거라고 담임선생님이 위로해 주었다.


삼십여 분의 상담을 끝내고 주차장으로 내려오다 문득 걸음을 멈췄다. 뭔가 허전했다. 아뿔싸, 막내가 부탁한 영어 문제집을 안 가지고 나왔다. 이런 정신머리. 급히 담임선생님께 사정을 적은 문자를 보내고, 다시 4층까지 올라갔다. 노크하고 슬며시 뒷문을 열었다. 선생님은 벌써 다음 학부모와 전화 상담 중이었다. 쭈뼛쭈뼛 눈과 표정으로 죄송하다고 말했다. 선생님도 휴대폰을 귀에 댄 채 내 쪽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책상을 찾았다. 서랍이 교과서와 공책으로 빼곡했다. 진땀이 났다. 빠른 속도로 한 권씩 꺼내어 살폈다. 겨우 문제집을 찾아 품에 안고 선생님 쪽을 향해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인 뒤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왔다. 휴. 세련되게 상담하고 우아하게 퇴장하고 싶었는데, 망했다.


다시 차 문을 여는 순간, 맙소사! 이번엔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더니 한 손엔 차키, 다른 손엔 영어문제집 뿐이다. 아니, 나 왜 이러는 겨? 담임선생님 앞이라고 긴장한 겨? 이쯤 되면 안 가지러 가고 싶다. 그냥 새로 살까? 힝.


또 계단을 헉헉거리며 뛰어 올라갔다. 뒷문에 세로로 좁게 난 작은 창문으로 훔쳐보니 여전히 전화상담 중이었다. 아이 책상 위에 다소곳이 놓여 있는 내 휴대폰이 커다랗게 눈에 들어왔다. 아까보다 더 작게 노크하고 더 미안한 표정으로 허리를 굽힌 채 들어갔다. 잽싸게 집어 들고는 도망치듯 교실을 나왔다. 뒤통수가 화끈거렸다.


밖으로 나오자, 3월 중순의 오후는 눈부시게 밝고 따뜻했다. 외투를 벗어야 할 만큼. 등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작은 실수쯤은 금방 잊힐 만큼 햇살이 끝내줬다. 차에 기대 잠시 숨을 골랐다. 쿡쿡 웃음이 삐져 나왔다.


젊고 친절한 선생님은 고개를 주억거리고 있겠지? 아이가 왜 그런지 알겠다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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