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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Dec 13. 2023

환대

'일상의 글쓰기' 글감 - [맛]

“언제 옥도 한번 가자.” “그래? 그럼 내일 가지 뭐.” 추석을 시댁에서 보내고 돌아와 친정 식구들과 모였다. 늘 하는 레퍼토리인 어린 시절 이야기 도중에 갑자기 예정에 없던 옥도행이 정해졌다. 술이 얼큰하게 취한 남편과 둘째 남동생이 분위기에 이끌려 나오는 대로 뱉어 내고는 주워 담지 못했다. 연휴도 남았고, 결혼하고 20년 넘게 남의 편 고향에만 다녔는데 이 기회에 가 볼까? 다음 날, 그런 약속을 했는지 기억도 못 하는 남편과 막내딸, 둘째네 식구 셋, 이렇게 여섯이 캠핑 준비를 해서 만났다. 마을 어르신들께 드릴 배 세 상자와 옛날 과자도 샀다. 작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작은 아빠가 홀로 살고 계시지만 거의 은둔자처럼 지내시니 거기서 숙박할 순 없다. 하루에 두 번 배가 있는데 새벽 다섯 시 반은 어림도 없고 오후 두 시 반 남신안농협 2호에 차와 함께 몸을 실었다.


배가 출발하면서부터 대박이 났다. 새우깡을 던져 주니 갈매기 수십 마리가 마치 공연하듯이 주변을 나는데 장관이다. 청명한 가을 하늘과 바다, 배가 만들어 내는 하얀 파도길 위에 커다란 날개를 펴고 날아드는 갈매기떼를 보니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새들을 거느리고 다니는 조련사가 된 기분이다. 엔진 소리를 뚫고 터져 나오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소리가 조금은 걱정이 되었던 여행의 시작을 가볍게 해 주었다.


새로 지은 집이 몇 안 되고 대부분 예전 그대로인데 하얀 벽에 다홍색 지붕을 얹어 동네가 깔끔하게 단장되어 있다. 빨간 산토리니 같다.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조그맣다. 세상에, 이렇게 작은 곳이었다는 게 놀랍다. 거인이 된 것 같다. 여기 이 골목, 바다, 산과 들이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재잘재잘 수다가 길어진다. 남편이 깡촌에서 출세했다고 놀린다. 잠잘 곳도 많은데 왜 한 데서 자느냐고 펄쩍 뛰시는 7촌쯤 되는 고모께 캠핑이 훨씬 재밌으니 걱정 마시라고 거절하는 것도 일이었다. 내일 점심이라도 꼭 해 먹이고 싶다고 하셨다. 정 있는 말씀에 할머니 생각이 났다.


옥도 작약센터로 명패를 바꾼 옛 옥도분교에 텐트 두 동과 그늘을 만들어 줄 타프를 치니 어디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낭만적인 우리만의 캠핑장이 되었다. 뒤편엔 낮은 산과 배추밭이 학교를 둘러싸고 운동장 바로 앞에는 낯익은 갯벌이 넓게 펼쳐 있다. 밤이 되면 바닷물이 발 앞까지 남실거릴 것이다. 멀리 듬성듬성 보이는 억새와 더할 나위 없이 신선하고 따사로운 공기가 가을의 정취를 더해 준다. “여기 너무 좋다!”, “날씨 정말 끝내 준다!” 식구들이 되풀이하는 말이 귓가에 울리는 설레는 노랫말 같다. 다들 좋아해서 다행이다. 잔디 옆의 강아지풀 무더기가 살랑거리니 덩달아 내 마음도 들뜬다.


길에서 만난 친구 엄마도, 자전거 타고 찾아오신 7촌 큰아빠도 집에 가서 밥 먹자고 하신다. 벌써 동네에 소문이 다 돌았나 보다. 말씀만이라도 고맙다. 분위기 있게 불을 피우고 도란도란 고기를 구워 먹는데 어둑어둑해진 마을에 종소리가 울리더니 언덕 위 교회에서 찬송가가 퍼진다. 내일이 주일이라 찬양 연습을 하는 소리인 듯하다. 이 감성 뭐지? 주일 학교에서 연극이랑 율동 연습하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보름달이 떠올라 갯벌에 자리한 또 다른 달과 서로 마주 본다. 물 빠진 밤바다가 환하게 빛난다.


밤낚시를 하러 갔다. 사리 때라 바닷물도 탁하고 물 들어 있는 시간도 짧아서 평소보다 문저리(망둥이)가 덜 낚인다고 한다. 드넓은 갯벌 위로 노둣길(바다 위에 만들어 놓은 썰물 때만 드러나는 길)이 길게 큰 개웅(갯고랑) 앞까지 쭉 뻗어 있다. 그 끝에는 뗏목처럼 생긴 나무다리가 문저리 낚시를 할 수 있게 대 놓은 작은 해태선(김 양식에 사용하는 배)과 연결된다. 개웅에 물이 차면 다리가 떠오르게 되어 있다. 개웅으로 조금씩 물이 들어온다. 딱 잘 맞춰서 왔다. 남편과 동생이 한 마리씩 낚기 시작한다. 문저리는 멍청해서 대나무에 낚싯바늘만 달아놔도 알아서 문다고 했는데, 오늘은 생각만큼은 아니다. 딸내미가 한 마리 잡고는 뛸 듯이 좋아한다. 여섯 살짜리 조카도 “왔다!”라고 소리치더니 연속으로 두 마리나 잡았다. 제 부모는 어린애가 입질을 느끼고 그걸 잡았다며 신기해서 어쩔 줄 모른다. 이것만으로도 체험 학습은 제대로 했다. 산 넘고 물 건너온 보람이 있다. 개웅에 물이 가득 차면 마을 앞 둑까지 밀고 들어오는 것이 순식간이라 좀 있다가 서둘러서 나왔다. 문저리를 열 마리쯤 낚았다. 탄력 받은 두 남자는 밀물이 들어온 학교 앞에서 새벽 세시 반까지 낚시를 더 하고는 40cm 넘는 농어 세 마리를 자랑스럽게 보여 주었다.


다음 날, 고모 집 점심 식탁엔 갈비, 잡채, 보리굴비, 직접 잡아서 버무린 새우무침, 도곳(돌옷) 등 시골 반찬이 한상 가득 차려졌다. 조선 시대 머슴밥처럼 고봉으로 담은 커다란 밥그릇을 보니 당황스럽다. 평소 양의 두세 배는 되는 것 같다. 정성을 생각해서 남기지 않으려고 반찬 그릇을 비우면 바로 다시 채우신다. 이런, 배가 부르다 못해 아프다. 빵빵해진 배를 잡고 마당으로 나오니 지팡이를 짚은 할머니 두 분이 들어오신다. 젊었던 얼굴에 주름이 졌지만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다. 내 손을 잡고 요즘 근황부터 시작해서 엄마 아빠 이야기, 옛날 추억을 쉴 새 없이 이야기하신다. 잠시 후에 또 다른 할머니들이 한 분 두 분 더해진다. 이야기꽃이 더욱 만발한다. 우리 엄마가 보고 싶다며 다음에 꼭 모셔 오라고 신신당부하신다. 눈빛이 아련하다.


남편은 점심 식사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너무 맛있었단다. 나는 이번 방문의 키워드를 ‘환대’라고 하고 싶다. 따뜻한 밥상과 어르신들이 잡아 주신 손, 애정 어린 눈빛, 정감 있는 이야기, 그리고 변한 듯 변하지 않은 풍경이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주었다. 출발할 때는 어색하고 조금은 두렵기도 했지만 떠나는 순간에는 포근한 마음으로 꽉 차는 듯했다. 내 고향이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어쩐지 이방인이나 여행자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는데 어르신들의 정다움 넘치는 환대를 받으니 당분간은 배가 안 꺼질 것 같다. 숙제를 해치워서 홀가분하고 받아들여졌다는 안도감이 느껴져서 또 올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고향이 거기 그대로 있다는 사실이 고맙다. 그분들이 오래오래 사셨으면 좋겠다.    


옥도를 떠나고 며칠이 지나서 현성 오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녀간 것을 이제야 들었는데 너무 성질이 난다면서, 왜 집에 안 들렀냐고 난리다. 옥도 선창 건너편 산과 들에 30억 원을 들여 작약꽃밭을 만들고 있다. 내년 5월엔 관광객들이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는데 꼼짝없이 내년에 엄마 모시고 한 번 더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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