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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그들이 약이다

일상의 글쓰기- 글감[약]

by 솔향

아이고, 오니라고 욕봤다. 옴마야, 느그 엄마 아빠만 오는지 알았드만 우리 지성이도 왔냐. 생각도 못 했는디, 잘했다. 잘했어. 밥 잘 먹고 다니제? 웃도리를 펑펑한 것을 입어서 그라제, 으째 살이 좀 빠졌는갑다. 공부하니라 힘들지야. 아니야, 식당 말고. 내가 요새 허리가 좀 안 좋아 갖고. 오늘은 간단히 집에서 먹자. 김치 몇 가지 하고, 게장하고 나물하고 좀 해 놨다. 저녁도 집에서 닭백숙 해 먹고 가그라이? 닭 사 왔제?

느그랑 같이 먹은께 겁나게 맛있다이. 혼자 먹으믄 이렇게 안 맛있어. 으짤 땐 입맛이 하나도 없어. 갈 때 게장 좀 싸 가그라. 지성이도 좀 챙겨 주고. 총각김치랑 얼갈이김치도 갖고 가그라이. 아이고, 나 혼자 먹으믄 얼마나 먹는다냐. 느그 오믄 줄라고 담어 놨지.


어디? 팔영산? 그라믄 차 있을 때 가 보까? 지성아, 느그 엄마 아빠가 오믄 이렇게 구경도 시켜 주고 참말로 좋다. 오늘은 니가 와서 더 좋고.


하이고, 차 타고 감서 본께로 진짜로 가을이다야. 저그 단풍 이쁘게 든 것 봐라. 능가사를 오래전에 한번 가고 안 가 봤다. 한 십 오륙 년 됐을라나? 옛날에는 절에도 열심히 다니고 우리 창수 대학 갈 때는 천수경도 다 외고 그랬는디. 하모, 내가 그때는 기억력이 좋았제. 밭고랑에서 지심 맬 때도, 부엌에서 일할 때도 열심히 외왔지. 내가 그것을 다 못 외믄 필시 떨어질 것 같어서 악착같이 다 외왔어. 호호. 우리 창수가 서울대 갈 수 있었는디 보짱이 없어서 못 썼어. 그때는 학교를 하나밖에 못 쓸 때라. 고려대 합격했는디 장학금을 받아 왔드라고. 그냥 탁 써 보지 그랬냐고? 아이고, 떨어지믄 할아버지한테 돈 타서 공부해얀디 으짠다냐? 우리 ‘아’들은 가심이 작어서 못 저질렀지.

우리 ‘아’들이 머심 노릇 많이 했다. 그 더운 날 느그 아빠, 우리 광수가 예초기로 할아버지네 넓은 과수원 풀을 몇 날 며칠을 가서 비고는, 숟구락 든 손이 덜덜 떨려서 밥을 지대로 못 묵는디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픈지 눈물이 나서 죽겄드라고. 돼지 똥 치우고, 까끄런 보리 비고. 고생 많이 했다. 우리 학수는 또 어쩌고. 군대서 결핵 걸려서 병휴가를 나왔는디 할아버지가 뭐 한디 돈 들게 나왔냐고. 니는 맨 돈 주라 한다고. 그 말을 듣는디 아무리 참을라고 입을 막아도 눈물이 터져 나와서 부엌 한쪽에 쪼그리고 앉아서 얼마나 끅끅 소리 내서 울었는가 몰라. 지금이야 군인들이 월급도 많이 받는다드라만 그때는 군인이 먼 돈이 있겄냐. 그때 마침 광주 동서가 와 있어서 형님, 뭐라 뭐라 하고, 재국이 삼촌이 와서 멀끔히 보고 가드라만, 그라든지 말든지 어찌나 서러운지 누가 때리는 것 맨치로 울음이 안 멈춰지드라고. 우리 아들들이 할아버지한테 돈 타서 공부하니라고 머심 노릇 많이 했다. 나는 식모 노릇하고.

아야 지성아, 할머니가 운다고 같이 울어 주냐. 고맙다이. 우리 지성이가 이렇게 인정 있당게. 할머니 손도 잡어 주고. 인자는 괜찮해. 느그 아빠도 그라고, 우리 아들들 그렇게 고생하고 컸어도 지금 을마나 다 잘 사냐. 크게 부자는 아니어도 다 가정 이뤄서 알콩달콩 산 께로, 나는 밥 안 묵어도 배부르다. 우리 동네선 다 나를 부러워해. 저 창수 친구 면장집 아들네미도 그라고, 자식들이 결혼 안 하고 있어서 애타는 아짐들이 쌔부렀어. 부자 부모 밑에서 큰 삼춘들이랑 고모들보다 고생하고 산 우리 아들들이 다 잘되고 편하게 산다. 인자는 내가 젤 걱정 없고 행복한 사람이제.


참말로 좋게 해 놨다이. 능가사가 이라고도 좋아졌구마이. 옛날에는 절 하나 딸랑 있었는디 진짜로 커졌다. 느그 아니믄 언제 이라고 나들이를 해 보겄냐. 들렀다가 핑 하니 간다고 가 불믄 이런 데 와 보도 못 하제. 우리 지성이랑 팔짱 끼고 걷고 가을 단풍이랑 구경하고 겁나게 행복하다. 팔영산 봉우리를 이렇게 뽀짝 가까이서 본 것도 첨이다야.


옛날 같으믄 말 한마디도 못하고 참고 살았는디, 인자 세월이 흘러서 내가 이렇게 수다쟁이 할머니가 돼 부렀다. 호호. 지성아. 인자는 나가 젤 편한 사람이다. 이렇게 좋은 데 와서 바람 쐐고, 말도 많이 한 께로 할머니가 기분이 좋아서 그란가 허리도 한 개도 안 아프다. 싹 다 낫어 부렀는갑다. 느그들이 약이다. 약. 얼른 집에 가서 백숙 해서 묵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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