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멋짐을 연기하다

어느 신규 교장 이야기

by 솔향

드디어 학교교육 설명회까지 끝났다. 한 학부모가 오더니 손을 붙잡고 ‘교장 선생님의 팬이 됐다.’고 호들갑이다. 작전 성공! 나를 보는 눈에 호감을 잔뜩 담은 저들을 보라. 히힛, 아님 말고.


학교장 인사말. 아주 짧고 강렬하게 하던지, 조금 길더라도 공감되고 듣는 사람이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내용으로 귀에 콕콕 박히게 해야 한다. 초보티가 나지 않게, 프로페셔널하게. 원래 게으른 천성을 따라 별로 힘들이지 않고도 효과가 좋은 전자를 선택할 것인가, 조금 귀찮아도 후자를 마련해 임팩트를 남길 것인가? 그래도 1년에 몇 번 안 되는데 조금 힘들어도 준비해야 되겠지?

짧은 소개와 함께 나누고 싶은 자녀 교육 방법을 유머와 감동을 넣어 에이포 네 장에 걸쳐 썼다. 더 길면 지루해질 수 있다. 그러고 나서 모조리 외웠다. 보고 읽으면 덜 멋져 보이니까. 간단한 프레젠테이션을 만들고 아무도 안 보는 데서 혼자 뻐끔뻐끔 리허설도 했다. 스티브 잡스처럼 핀 마이크를 귀에 걸면 좋은데 이 학교에 그런 건 없나 보다. 워워. 처음부터 오버하지 말자.


그냥 짧게 할걸. 에잇, 어쩔 수 없지. 이미 깔린 멍석이다. 미소를 띠며 자연스럽게 청중에게 골고루 눈을 맞췄다. 모든 시선이 한 곳으로 모였다. 눈을 떼지 않고 집중하며 고개를 끄덕이고, 숨겨 놓은 유머 포인트에서 웃음을 터뜨린다. 뒤늦게 입을 가리며 웃는 사람도 보인다. 대부분 듣는 표정이 괜찮다. 안심이다. 당황해서 꼬인 발음도 없다. 그래. 어릴 때부터 무대 체질이었잖아. 율동도 연습 때보다 공연 날 훨씬 더 잘했다. 교장이 너무 젊다고 읍내에서 핫이슈였다는데 이거 똑순이 교장으로 소문나는 거 아닌지 모르겠다. 너무 기대가 크면 좀 피곤한데 말이야.

자리에 들어오자 교감 선생님이 눈물이 났다며 소곤거린다. 아마 ‘부모 노릇’ 이야기하는 부분이었을 것이다. 자식 키우는 엄마라 와닿았나 보다. 그녀는 첫날 입학식 때도 그림책을 읽어주고, 신입생 학부모께 드리는 말을 하고 내려오자 내게 “멋있어.”라며 찬사를 보냈었다. 내가 그녀의 스타일인가? 처음 본 사이에 스리슬쩍 반말을 해서 당황하긴 했지만. 하긴 내가 좀 만만해 보이는 얼굴이긴 하다. 너무 웃고 다니니 이렇게 무게가 없어 걱정이다. 그래도 칭찬에 약한지라 뭐. 이쯤 되면 민망하니까 며느리에게도 안 밝히는 비법을 알려줘야겠다.

하하. 그거 연기하는 거예요. 연설하는 연기.”

속으로는 무지하게 쫄았다. 여러 친구들과 다같이 얼싸절싸 보여주는 어릴 적 율동 공연이 아니니까. 도대체 어떤 사람이 새로 왔나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앉아 있는 이들에게 보이는 첫인상이니까. 특별히 지식이 꽉 찼거나 올곧은 신념의 대명사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달변가도 아니니, 열심히 빈틈없이 연습해서, 훌륭한 교육철학을 감동적으로 강연하는 전문가를 연기하는 수밖에. 원래 잘나고 멋진 것처럼.


준비 없으면 입을 열지 말자. 들통나니까. 휴, 앞으로도 연기 공부 열심히 하려면 물 아래에서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버둥대야겠구나. 게으르게 놀긴 틀렸다. 그게 내 꿈인데. 가만, 이러다 진짜 멋져지는 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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