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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솔향 Jan 07. 2024

사랑하는 딸에게

'일상의 글쓰기' 글감 - [다른 존재가 되어 나를 바라보기]

마음 맞는 벗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삶을 나누고픈 계절이구나. 너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쓰려고 앉아 기억을 더듬어 보자니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식상한 말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숱한 일이 지나갔지. 많이 견뎌 냈고,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다.     


내 속을 열어 보이려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등학교 다니면서 만난 아빠 이야기부터 해 보마. 교대에 가라는 네 할아버지께 반항하느라 원서도 안 넣고, 차라리 농사짓겠다고 고향 섬으로 들어왔단다. 나도 목포에서 간호조무사로 막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만두고 따라왔지. 네가 생겨서 어쩔 수가 없었어.


8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와서 보니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사일에 매달려 손 놀 틈이 없는 곳이었어. 교복 입고 학교 다니며 양장점에서 옷이나 맞춰 입을 줄 알았지 농사일이나 집안일에는 서툴러서 처음부터 시부모님 눈 밖에 났어. 국민학생인 막내 시누이보다도 손이 여물지 못하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핀잔과 꾸지람을 들었단다. 시집살이가 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 아빠도 점점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더 서글펐지.      


네가 태어나자 네 할머니가 “아이고, 짜잔한 딸을 낳았네.”라는 싫은 소리로 또다시 서럽게 했지만, 사랑받을 복을 타고났던지 너는 귀엽고 영리해서 온 식구가 예뻐했어. 기어 다닐 때였는데 심한 관절염으로 걷는 것도 힘들던 네 할머니가 소피가 마려워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 뽈뽈 기어가서 요강 뚜껑을 열고 할머니를 기다리곤 했단다. 어린 게 어찌 이리 일되고 똘똘하냐고 신기해했지. 걸음마도 일렀고 말문도 빨리 트였단다. 대문 밖 골목길을 자박자박 왔다 갔다 하며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잘해서 ‘뽀빠이’를 여러 개씩 받아 오곤 했지.


저녁마다 지친 몸을 누이고, 잠든 너를 바라보면 잠시나마 피곤을 잊을 수 있었어. ‘어서 커라, 어서 커. 빨리 자라서 엄마 말을 들어주고 마음도 알아주렴.’ 하고 되뇌면서 하루하루 버텼단다.      


마을 이장을 하던 네 아빠는 남 일에는 발 벗고 나서서 처리해 주는 해결사였어. 인물도 훤하고 사람 좋다는 소리만 들었지, 정작 가정은 너무나도 등한시했어. 밭과 논을 받아 살림을 따로 나와 살면서도 자기 논에 벼가 익는지 썩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 김 양식, 포자 배양장 사업, 벌이는 것마다 실패하고 빚만 늘어 갔어. 아이들은 커 가는데, 그곳에서는 죽어라 고생만 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견디다 못해 목포에 나가서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하소연해도 듣지 않았지. 도망 나오지도 못하고 너희들을 보며 울음을 삼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팍팍한 삶에서 너는 내 말동무이고 기쁨이었어. 녹초가 되었어도 잠들기 전에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동요를 가르쳐 함께 부르며 보내는 시간이 참 행복했단다. 동생들 돌보면서 집안일을 돕고 엄마 맘도 알아주는 딸을 하나라도, 그것도 딸을 낳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중학교에 보내느라 목포 외삼촌 에 너를 맡겨 놓고는 용돈 한번 보낸 적이 없었지. 눈칫밥을 먹지는 않는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챙겨 볼 여유도 없었다. 사정이 더 어려워진 시기였어. 너는 투정 한 번이 없었지. 고등학교 원서를 낼 무렵에 “엄마, 나 여상고에 갈까?”라는 전화를 받고 마음이 아팠어. 없는 형편을 생각해서 고민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그때 결심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겨우 시장에 작은 쌀가게를 얻어 목포로 나온 것이 너 고2였던가? 몇 달 지나서 따라 나온 네 아빠가 처음엔 코딱지만 한 가게에서 밥벌이가 되겠냐고 헛웃음 치더니 슬금슬금 배달하더구나. 단골이 생기고 그런대로 돈이 잘 들어와서 빚도 조금이나마 갚아 나갔어. 네 아빠도 시장 상인들과 잘 지내며 재미를 붙여 일하고, 서로 농담하며 웃는 날도 많아졌지. 너는 용돈을 벌면서 대학에 다녔고, 부모가 고생하는 걸 아는지 네 동생들도 착했어. 이렇게만 하면 우리도 살 만한 날이 오겠다 싶었다. 가장 희망에 찬 3년여였어.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구절은 나를 두고 쓴 듯하다. 부활절 새벽이었다. 네 아빠가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줄줄이 네 아이를 남겨 두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날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현실에 ‘하나님,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라는 원망밖에 안 나오더구나.


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정신을 붙잡아야 했어. 엄마가 중심을 잡아야 했으니까. 너는 방학이 되어 내려올 때마다 엄마 옷을 사 오고 집에 필요한 것을 살뜰하게 챙겼지. 네가 경기도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동생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낼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의논할 수 있는 맏딸이었지. 너에게 참 많이 의지했어. 네가 있어 든든했단다.     

 

그 고달픈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꿈만 같구나.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푸쉬킨의 시 뒷 구절처럼 이제는 자녀 네 명이 모두 가정을 이뤄 손주들 재롱을 보며 웃는 평안한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내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네 아빠를 당당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구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랑하는 딸아. 지인들은 ‘아들 집에 살면 길바닥에서 죽고, 딸 집에 살면 싱크대에서 죽는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손녀를 돌보려고 너희 가족이랑 함께 살면서 너를 도울 수 있어서 기뻤단다. 스스로 알아서 커 준 너희들에게 다하지 못한 정성을 손녀들에게 쏟았지.


그런데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할 일도 그다지 없어서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장모가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이 서방한테도 미안하고, 가끔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면 혹시 나 때문인가 하고 쓸데없이 눈치가 보이는구나. 너도 예전 같지 않아서 집에 오면 말수가 줄어 통 이야기를 안 하니 가끔씩 가시방석이다. 너에게 서운한 말은 되도록 안 하려고 했는데 예전의 사근사근했던 네가 그리워 마음에 담아둔 말을 꺼내게 되었다.      


나이가 드니 주책이구나. 옆에 있는 네가 제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서방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렴.

  

엄마는 항상 네 가정을 위해 기도한다. 이제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것 같구나. 주 안에서 평안하고 늘 지켜 주시길 오늘도 기도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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