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딸에게
'일상의 글쓰기' 글감 - [다른 존재가 되어 나를 바라보기]
마음 맞는 벗과 마주 앉아 이런저런 삶을 나누고픈 계절이구나. 너에게 처음으로 편지를 쓰려고 앉아 기억을 더듬어 보자니 세월이 유수와 같다는 식상한 말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숱한 일이 지나갔지. 많이 견뎌 냈고, 가끔은 행복하기도 했다.
내 속을 열어 보이려면 무슨 말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등학교 다니면서 만난 네 아빠 이야기부터 해 보마. 교대에 가라는 네 할아버지께 반항하느라 원서도 안 넣고, 차라리 농사짓겠다고 고향 섬으로 들어왔단다. 나도 목포에서 간호조무사로 막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만두고 따라왔지. 네가 생겨서 어쩔 수가 없었어.
8남매의 장남에게 시집을 와서 보니 새벽부터 저녁까지 농사일에 매달려 손 놀 틈이 없는 곳이었어. 교복 입고 학교 다니며 양장점에서 옷이나 맞춰 입을 줄 알았지 농사일이나 집안일에는 서툴러서 처음부터 시부모님 눈 밖에 났어. 국민학생인 막내 시누이보다도 손이 여물지 못하다고 하루에도 열두 번씩 핀잔과 꾸지람을 들었단다. 시집살이가 고되었을 뿐만 아니라 네 아빠도 점점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아서 더 서글펐지.
네가 태어나자 네 할머니가 “아이고, 짜잔한 딸을 낳았네.”라는 싫은 소리로 또다시 서럽게 했지만, 사랑받을 복을 타고났던지 너는 귀엽고 영리해서 온 식구가 예뻐했어. 기어 다닐 때였는데 심한 관절염으로 걷는 것도 힘들던 네 할머니가 소피가 마려워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면 뽈뽈 기어가서 요강 뚜껑을 열고 할머니를 기다리곤 했단다. 어린 게 어찌 이리 일되고 똘똘하냐고 신기해했지. 걸음마도 일렀고 말문도 빨리 트였단다. 대문 밖 골목길을 자박자박 왔다 갔다 하며 만나는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잘해서 ‘뽀빠이’를 여러 개씩 받아 오곤 했지.
저녁마다 지친 몸을 누이고, 잠든 너를 바라보면 잠시나마 피곤을 잊을 수 있었어. ‘어서 커라, 어서 커. 빨리 자라서 엄마 말을 들어주고 마음도 알아주렴.’ 하고 되뇌면서 하루하루 버텼단다.
마을 이장을 하던 네 아빠는 남 일에는 발 벗고 나서서 처리해 주는 해결사였어. 인물도 훤하고 사람 좋다는 소리만 들었지, 정작 가정은 너무나도 등한시했어. 밭과 논을 받아 살림을 따로 나와 살면서도 자기 논에 벼가 익는지 썩는지도 모르는 사람이었지. 김 양식, 포자 배양장 사업, 벌이는 것마다 실패하고 빚만 늘어 갔어. 아이들은 커 가는데, 그곳에서는 죽어라 고생만 하고 희망이 없다고 생각했다. 견디다 못해 목포에 나가서 일자리를 찾아보자고 하소연해도 듣지 않았지. 도망 나오지도 못하고 너희들을 보며 울음을 삼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단다.
팍팍한 삶에서 너는 내 말동무이고 기쁨이었어. 녹초가 되었어도 잠들기 전에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고, 동요를 가르쳐 함께 부르며 보내는 시간이 참 행복했단다. 동생들 돌보면서 집안일을 돕고 엄마 맘도 알아주는 딸을 하나라도, 그것도 맏딸을 낳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중학교에 보내느라 목포 외삼촌 집에 너를 맡겨 놓고는 용돈 한번 보낸 적이 없었지. 눈칫밥을 먹지는 않는지, 학교는 잘 다니고 있는지 챙겨 볼 여유도 없었다. 사정이 더 어려워진 시기였어. 너는 투정 한 번이 없었지. 고등학교 원서를 낼 무렵에 “엄마, 나 여상고에 갈까?”라는 전화를 받고 마음이 아팠어. 없는 형편을 생각해서 고민했을 걸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 그때 결심했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여기서 나가야겠다고.
반대를 무릅쓰고 겨우겨우 시장에 작은 쌀가게를 얻어 목포로 나온 것이 너 고2였던가? 몇 달 지나서 따라 나온 네 아빠가 처음엔 코딱지만 한 가게에서 밥벌이가 되겠냐고 헛웃음 치더니 슬금슬금 배달하더구나. 단골이 생기고 그런대로 돈이 잘 들어와서 빚도 조금이나마 갚아 나갔어. 네 아빠도 시장 상인들과 잘 지내며 재미를 붙여 일하고, 서로 농담하며 웃는 날도 많아졌지. 너는 용돈을 벌면서 대학에 다녔고, 부모가 고생하는 걸 아는지 네 동생들도 착했어. 이렇게만 하면 우리도 살 만한 날이 오겠다 싶었다. 가장 희망에 찬 3년여였어.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라는 시구절은 나를 두고 쓴 듯하다. 부활절 새벽이었다. 네 아빠가 대학생부터 초등학생까지 줄줄이 네 아이를 남겨 두고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난 날이. 세상이 무너지는 것 같은 현실에 ‘하나님, 도대체 저에게 왜 이러시나요?’라는 원망밖에 안 나오더구나.
하지만 자식들 때문에 정신을 붙잡아야 했어. 엄마가 중심을 잡아야 했으니까. 너는 방학이 되어 내려올 때마다 엄마 옷을 사 오고 집에 필요한 것을 살뜰하게 챙겼지. 네가 경기도에서 근무하고 있어서 동생들을 서울에 있는 대학에 보낼 때도 많은 도움이 되었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의논할 수 있는 맏딸이었지. 너에게 참 많이 의지했어. 네가 있어 든든했단다.
그 고달픈 인생길을 어떻게 헤쳐 왔는지 꿈만 같구나.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라는 푸쉬킨의 시 뒷 구절처럼 이제는 자녀 네 명이 모두 가정을 이뤄 손주들 재롱을 보며 웃는 평안한 날이 오고야 말았다. 내 할 일을 다 마쳤으니 네 아빠를 당당하게 만날 수 있을 것 같구나. 모두 하나님의 은혜이다.
사랑하는 딸아. 지인들은 ‘아들 집에 살면 길바닥에서 죽고, 딸 집에 살면 싱크대에서 죽는다’며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손녀를 돌보려고 너희 가족이랑 함께 살면서 너를 도울 수 있어서 기뻤단다. 스스로 알아서 커 준 너희들에게 다하지 못한 정성을 손녀들에게 쏟았지.
그런데 이제 아이들도 다 크고 할 일도 그다지 없어서 다시 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고민이 된다. 장모가 있어서 조심해야 하는 이 서방한테도 미안하고, 가끔 집안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으면 혹시 나 때문인가 하고 쓸데없이 눈치가 보이는구나. 너도 예전 같지 않아서 집에 오면 말수가 줄어 통 이야기를 안 하니 가끔씩 가시방석이다. 너에게 서운한 말은 되도록 안 하려고 했는데 예전의 사근사근했던 네가 그리워 마음에 담아둔 말을 꺼내게 되었다.
나이가 드니 주책이구나. 옆에 있는 네가 제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이 서방에게도 고맙다고 전해주렴.
엄마는 항상 네 가정을 위해 기도한다. 이제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것뿐인 것 같구나. 주 안에서 평안하고 늘 지켜 주시길 오늘도 기도하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