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게는 행복만큼 불행도 필수적이다
교문 공사를 월요일까지 마무리하기로 해 놓고는 또 연기됐다고 변명하는 현장 소장과 다투는 꿈을 꾸다 깼다. 매일 학교 공사와 관련되거나, 선택 지옥, 결정 지옥에 빠지거나, 뭔가를 자꾸 해결하느라 머리가 도는 꿈을 꾼다. 아직 일곱 시였다. 너무 행복했다. 꿈이라서. 어제저녁에 퇴근해서 밥 먹고, 씻지도 않고 누웠다가 그대로 잠들어 버렸나 보다. 화장실 다녀와서 거울을 보니 입술이 아직 빨갛다. 입냄새도 장난 없을 터다. 아직 세상 달게 자고 있는 남편을 흘낏 보았다. 본의 아니게 요새 자주 민폐를 끼친다. 밤새 피부와 입속이 썩었겠다.
씻고 나와 뒹굴뒹굴 뉴스와 유튜브를 봤다. 옆에 자던 남편의 팔다리가 나를 꼭 감싸 안는다. 내 귀에 대고 드르렁 코를 곤다. 몸도 마음도 포근해 잠시 그대로 두다가 무거워 떼어 냈다. 이렇게 휴대폰이나 계속 들여다보는 게 좀 한심한 것 같아 옹졸 작가가 추천한 최진석 교수의 <인간이 그리는 무늬> 책을 들고 거실로 나왔다. ‘들어가는 글’을 조금 읽다 졸려 소파에서 또 잤다. 행복해서 몽글몽글했다. 토요일 아침이라서.
아홉 시쯤 다시 일어나, 냉장고에 남아 있던 밤식빵을 믹스커피와 함께 야금야금 뜯어먹고, 책을 조금 더 읽었다. 당최 집중이 안 된다. 요즘 빠져 있는 경상도 남자 중에 젤 멋진 남자, 문형배 재판관 유튜브 영상을 터치했다. 그분이 추천하는 책,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신영복 교수의 <담론>,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김훈의 <칼의 노래>, 황석영의 <삼국지>를 소개해 준다는 명목으로 옹졸·째까니 작가와의 단톡방에 들어가 아침부터 수다를 떨었다. 시간 날 때 일상을 공유하고, 책과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과의 카톡 수다가 즐겁다. 구질구질한 내 생각을 누가 이들만큼 진지하게 들어줄까. 아침이 한가로웠다. 가슴이 살랑살랑 정다웠다.
막내딸 밥을 차려 주고, 소파에 드러누워 책에 몰입하려 노력했다. 의지를 끌어모아 한 챕터를 겨우 읽었다. 잠이 쏟아진다. 자도 자도 몸이 뻐근하다. 피로 누적이다. 오늘은 마음껏 쉬고 마음껏 자야지. 책을 덮고, 제대로 잠에 빠져 보려는데 번뜩 미용실 예약한 것이 생각났다. 시간을 보니 30분 남았다. 다행이다. 적당한 시간에 안 잊어먹고 떠올라서.
“최대한 두피 근처까지 꽉꽉 말아주세요.” 이상하다. 예전엔 미용실에 있는 시간이 지루하고 지겨웠는데, 잔잔한 미용실 음악도, 가만히 앉아 멍 때리는 것도, 머리를 만져 주는 간질간질한 손길도, <침묵의 서> 책을 소개하는 유튜브 속의 교수님 목소리도 좋다. 친절한 모자(사장님이 아들과 함께 운영하심)에게 머리손질받는 세 시간이 훌쩍 지났다. 오랜만에 다시 원했던 사자머리로 변신하고 딸들이 원하는 떡볶이와 과자, 내가 좋아하는 자두를 사 들고 집에 복귀했다. 아직 네 시 반밖에 안 됐다. 콧노래가 나왔다.
배불리 먹고 습관처럼 시원한 에어컨 아래, 매트리스에 누웠더니 그새 옹졸 작가가 글을 올렸다. 역시 그녀의 글은 남다르다. 예사로운 우리들의 글과는 다른 솔직함과 엉뚱함에서 오는 감동이 있다. 나도 써야 하는데 쓸 게 없는 게 비극이다. 나는 생각을 정리하는 게 어렵다. 내 생각을 나도 잘 모르겠어서.
남편이 아이스크림이랑 새우를 사서 들어왔다. 새우 굽는 냄새가 솔솔 코를 유혹한다. 목장갑을 끼고는 새우를 한 알 한 알 까준다. 음, 행복한 맛이 이런 거겠지. 무지하게 고소하다. 올가을에도 내년에도, 하이웨이스트 바지가 유행이라던데 배가 점점 볼록해져 큰일이다. 디자이너들도 문제가 많다. 백성들 체형은 생각 안 하고 무조건 유행만 만들어 내면 다냐고! 빵빵한 배를 두드리며 새우의 힘을 빌어 노트북을 열었다. 뭔가 새로운 일이 있어야만 글을 쓸쏘냐. 평범한 일상의 순차적 나열도 글이 된다는 걸 보여줘야지. 있었던 일 조르르 쓰는 건 쉬우니까. 난 극사실주의 작가니까.
글을 쓰면서 오늘 유난히 행복하게 느꼈던 이유를 알아냈다. 늦잠 자고, 책 읽고, 유튜브 보고, 미용실 가고, 장 봐서 맛있는 것 먹는 평범한 주말 일상이 오늘따라 왜 더 즐겁고 편안하고 날아갈 듯 가벼웠는지. 순간순간이 왜 그리 소중하고 여유로웠는지.
지난 한 주간은 정말로 바쁘고 힘들었다. 학교 건물이 신축되고 방학 동안 이사하면서 학교는 상상을 초월한 업무 폭탄을 맞았다. 최선을 다해 개학 준비를 했음에도 공사업체의 나머지 공사 일정 이슈, 지나치게 관심 많은 학부모의 민원, 새 건물을 사용하면서 나오기 시작한 각종 하자, 안전한 통학을 위해 군청과 경찰서에 횡단보도와 신호등 설치해 달라 로비해야 하는 부담, 업무 치사량에 도달한 행정실 직원들 달래기,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위한 각종 협의, 교장단 총무로서 퇴임식 준비, 학교 직원 퇴임식 등등등. 심지어 화장실 물이 중단되는 말도 안 되는 사태까지 셀 수 없이 많은 일이 쏟아졌고 새벽 출근과 늦은 퇴근, 쓰러져 자는 일과가 반복되며 닷새 만에 머리와 몸이 한도 초과되는 기분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평소와 같은 날인데 왜 지난 또는 지지난 주말과는 내 마음이 달랐는지. 이것이 그 답이다. ‘단조로운 삶은 단조로운 행복만을 약속한다.’ 양귀자의 소설에 나오는 말이던가?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닷새가 있었기에 그 이후에 찾아온 주말이 너무나 달콤했던 것이다. 나는 비로소 일상의 작지만 소중한 행복의 보슬비를 하루 종일 맞았다.
쉴 동안은 애태워 봐야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학교 걱정은 완벽히 잘라낼 것이다.(그런데 계속 전화와 문자가 온다. 얼른 결정만 해 주고, 바로 끊어내자. ㅜㅜ) 아! 브런치에 올릴 글까지 썼는데 아직도 토요일이 네 시간이나 남았고, 쉴 수 있는 하루가 더 기다리고 있다니, 가슴에서 물방울이 뽁뽁 터지는 것처럼 청량하다. 이 기분 알랑가? (솔직히 학교 안 가는 게 이렇게 좋을 일이야? 큰일이다, 큰일.)
아직도 정년이 십 년 넘게 남았는데 지금 그만둘 수도 없고. 내일까지 충분히 행복으로 충전하고 사자 머리 날리며 또 전쟁터로 나가보자! 아자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