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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모의 시절

그땐 그랬지

by 솔향

<백번의 추억>이라는 드라마가 방영 중이다. 어제까지 4회가 끝났다. 맘에 드는 드라마가 또 나오다니. 최근엔 <인중과 상연>에 정신 못 차리고, 만 하루 만에 열다섯 편 전체를 올킬한 전적이 있다. 이젠 책 읽고 글도 좀 쓰자며 반성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는데 큰일이다. 누워서 리모컨이나 붙들고 있는 나를 한심해하지 않으려 변명해 보자면, 스토리가 탄탄한 드라마나 영화는 책만큼이나 가치 있다. 게다가 읽을 때보다 에너지도 덜 들면서 재미도 얻고, 삶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으니 얼마나 이득인가. 에휴, 이것까지만 보고 끊어야겠다.


'1980년대 100번 버스 안내양 영례와 종희의 빛나는 우정, 그리고 두 친구의 운명적 남자 재필을 둘러싼 애틋한 첫사랑을 그린 뉴트로 청춘 멜로'라고 드라마 소개란에 나와 있다. 가난하지만 공부를 잘하는 영례의 오빠는 명문대 법대에 다닌다. 오빠 못지않게 영민한 영례는 공부해서 선생님이나 교수가 되고 싶지만 아빠가 돌아가신 데다 엄마를 도와 어린 두 동생까지 건사해야 해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버스 안내양이 된다. 그 시절엔 그랬다.


엄마와 잠깐 섬에서 나와 목포에서 산 적이 있다. 내가 다섯 살부터 일곱 살 때까지였으니 1977년에서 1979년의 2-3년 간이었을 것이다. 엄마는 죽어라 농사를 지어도 찌들게 가난한 섬에서는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며 목포로 나가자고 아빠를 설득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불호령에도 엄마는 기어이 나보다 세 살 어린 동생과 나를 데리고 나왔다. 대성동 용꿈여인숙 아래 범벅장수 부부의 집, 작은 부엌이 딸린 방 한 칸에 세 들었다. 다정했던 범벅장수 할머니와 할아버지, 단칸방 안의 서랍장, 작은 흑백텔레비전, 방 밖으로 난 좁은 마루, 주인집과 같이 썼던 수돗가 등이 선명하다. 엄마는 아모레 화장품 외판원으로 들어갔고, 영업을 잘했다. 돈을 조금 벌자, 텔레비전 보다가 혼자서 한글을 깨친 나를 위해 당장 60권짜리 계몽사 전래동화, 세계명작 전집을 사들였다. 그 빨간색과 노란색 표지의 동화책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백번씩도 넘게 읽어 외울 지경이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았다. 엄마는 고등학교 졸업 무렵 외할아버지가 빚보증 사고로 망하긴 했지만, 부잣집에서 자라 트인 여자였다. 인물만 멀끔한, 어디 구석에 붙어있는지도 모를 낙도 출신 8남매의 장남과 고딩때부터 연애하는 바람에 제 발로 진흙탕에서 헤엄치는 삶으로 기어들어갔지만 말이다.


대성동 성코롬반 병원으로 올라가는 골목길이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가까웠다. 그 골목길 집들 중 하나에 셋째 고모가 숙식하고 있었다. 어떻게 가게 됐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나절쯤 그 집에서 놀았다. 거실처럼 보이는 넓은 공간에 흰 천이 팽팽히 당겨져 있는 크고 네모난 수틀들이 비스듬히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고모와 그 또래 어린 처녀 예닐곱이 수틀 앞에 앉아 모란이며, 학이며, 나비를 알록달록 어여쁘게 수놓았다. 아마도 병풍이나 이불보 같은 것을 만드는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도 한 두 명 있었는데, 은하 조카라며 강냉이도 한 됫박 내놓고, 점심도 주었다. 다들 따박따박 대답을 잘하는 내게 말을 걸며 귀여워했지만 나와 놀아 줄 시간은 없었다. 마당을 돌아다니며 꽃 구경하고, 골목길에도 나가 고개를 비죽이며 다른 집의 대문 너머를 훔쳐봤다. 그 골목에는 자수 놓는 공장 같은 집들이 모여 있다는 걸 알았다.


셋째 고모는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는 섬을 떠나 목포의 수놓는 집에 보내졌다. 가내 수공업 하는 곳이라 봐도 무방하다. 손 자수를 배워, 온종일 바느질을 했다. 숙식 제공받는 것을 제외하고 남은, 적은 돈을 받았다. 다리가 저리고 고개와 어깨가 빠질 것 같았으리라. 그렇게 고개를 처박고 몸을 웅크린 채 소녀 시기를 모두 보내고, 그녀는 아내 말을 우선적으로 들어주는 자상한 말단 공무원을 만났다. 고모부와 결혼할 무렵 손 자수는 미싱 자수에 밀려 대중에게서 거의 멀어졌다. 공부에 한이 맺힌 고모는 내가 중고등학생일 때, 아이들을 키우며 주말에 공부하는 인허가 중학교와 고등학교에서 늦은 학업을 마쳤다. 고모집에 가면 청소를 하면서도 영어 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모르는 문법을 내게 물어 답을 해결하고는 용돈을 쥐어 보내곤 했다. 어디 돈 나올 데 하나 없던 내게 고모의 지갑에서 내 손에 건네지던 그 오천 원, 만원 짜리는 학창 시절 숨 쉴 구멍이 되어 주었다.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결혼하기 전까지 수예로 돈을 벌기는 첫째와 둘째 고모도 마찬가지였다. 아마도 유교를 신봉하셨던 할아버지가 공장보다는 수예가 낫다고 판단하셨을 것이다. 넷째 고모는 할머니가 아프게 되면서 집에 남아 농사를 짓고 살림을 해야 했다. 엄마는 우등상장만 받아 오던 영리한 고모들이 중학교 진학을 못하고 일하러 가야 하는 것에 마음 아파했다. '너희 할아버지가 아무리 똑똑한 척해도 이건 무지한 일이다. 딸들도 교육을 시켜야 한다.'라고 어린 내게 말했다. 아빠와 삼촌들은 어땠나. 폼생폼사인 아빠는 국민학교 선생은 하기 싫다고 스스로 대학을 내팽개친 경우라 예외이고, 작은 아빠는 논 팔고, 밭 팔아 대학까지 보냈다. 딸들 중에서는 막내 고모만 유일하게 여상고에 갔다. 위의 고모들과는 나이 차이가 나는지라 시대가 조금 바뀌기도 했고, 막내 삼촌보다 한 살 위이던 막내 고모를 삼촌 밥 해 주게 한다는 명분으로 할아버지가 슬그머니 허락했다. 고립된 곳이라서 어른들의 더 생각이 갇혀있었다. 섬은 지방 소도시보다도 10년 이상 낙후되어 있는 곳이었다. 학교도 겨우 국민학교 분교가 하나 있을 뿐이라 중학교부터는 목포로 나가야 했는데, 없는 살림에 아들들 공부시키기에도 허덕였을 것이다.


고모들보다 조금 늦게 태어난 게 얼마나 행운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나도 대학에 못 갈 뻔했다. 중학교 3학년 때, 고등학교 원서를 쓰는데 일반고와 상고 중에서 정하게 되어 있었다. 상고에 간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는데 문득 외삼촌댁에 나를 맡겨 놓고 용돈 한번 보내줄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부모, 내 밑으로 줄줄이 남동생이 셋이나 있는 처지가 생각났다. 이런 집에서 내가 일반고에 가도 되는가 하고. 농사일에 지쳐 원서를 쓰는지 마는지도 관심이 없을 엄마에게 학교에서 공중전화를 걸어 "나 원서 쓰는데, 형편 어려우면 상고 쓸까?"라고 물었다. "뭔 소리여. 당연히 일반고 가야지. 아빠는 너 서울대 갈 줄 알고 있는데."라는 엄마의 대답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 서울대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지만 혹시라도 '그래라.'라고 했으면 어쩔 생각이었나. 그해 시골 여자 친구들 중에는 돈 벌면서 학교 다니는 산업체 학교에 여러 명이 진학했다. 그때도 그랬다.


그렇게 우리나라는 남녀차별을 온몸으로 견딘 꿈많은 소녀들의 희생을 먹고 눈부시게 발전했다. 지금은 어떤가? 나라가 잘살게 된 만큼 차별은 줄었다. 상대적으로 대우를 받고 자란 남자들은 이제는 완전히 평등하다 하고, 지난 세대가 부러운 젊은 세대는 오히려 여성상위라고 주장할 만큼 말이다. 지난주에 학교장 대상 성인지 감수성 교육이 있었다. 강사는 평등한 듯 보이지만 아직도 우리나라는 여성이 다수인 직종의 임금이 전반적으로 낮고, 같은 교육 수준을 고려해도 여성은 남성의 70퍼센트쯤의 임금밖에 받지 못한다고 했다. 한 남자 교장선생님이 언짢은 어투로 남성과 여성이 힘에서 차이가 있는데 왜 차이가 없다고 하냐며 반발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능력이 더 있으니 더 많이 받는 게 당연하다는 말 같았다. 강사는 차이를 존중하되 차별은 안 된다는 말이라며 그 차이의 우위는 누가 정한 것인가도 생각해 봐야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강사는 남자였다.


70-80년대 우리 고모 세대를 추억하다 괜히 논란이 될 이야기까지 꺼내고 말았다. 이래서 글은 짧게 쓰는 게 좋다. 잘못하면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니. 주장하는 글을 쓰는 게 아니라서 이만 줄여야겠다. 아 참, 한 마디만 더 덧붙이자면 오늘 전국교육감협의회 기사를 보다가 우리나라는 아직 멀었다고 확신했다. 이 사진을 보고 이처럼 고위직에 여자가 진출하고, 여자 대통령도 한 명 나왔으니 한국사회에 더 이상 성차별은 없다고 해석할 사람이 있을까? 설마?



PS. 셋째 고모와 마찬가지로 넷째 고모도 아이들 다 키워 놓고 뒤늦게 고등학교 학력을 취득하고 사이버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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