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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 좋아하세요?

떫은 맛 가을

by 솔향

물론. 단감도 홍시도 좋아한다. 땡감도 없어서 못 먹지. 목이 막히면 가슴을 두드려가며, 떫은 감도 무지 잘 먹는다. 뿐이랴. 대추도, 무화과도, 앵두도...


엄마가 단감 키우는 권사님 댁에 놀러 갔다가 한 망태기 받아왔다. 마침 냉장고 과일 칸이 텅 비어 마음 허했는데 잘 됐다. 한 개를 꺼내 수돗물에 대충 한번 휘휘 씻어 선채로 곧장 한입 베어 물었다. 사근사근하니 씹는 맛이 경쾌하고 달다. 적당히 단단하고 잘 익었다. 맛을 확인했으니 대여섯 개는 더 먹어야 한다. 한두 개 깨작거리는 건 내 취향이 아니므로. 뽀득뽀득 문질러 닦아 키친타월로 물기를 없애고, 쟁반에 받쳐 소파에 앉았다. 막내딸에게도 권했더니 껍질을 안 깎아서 싫단다. 뭐? 단감은 껍질째 먹어야 제맛이지. 포도는 씨가 있어서, 복숭아는 물복이 아니라 딱복이라서, 바나나는 점이 징그러워서 안 먹는다. 지가 뭐 공준가? 싫으면 말어라. 호강에 겨웠어. 아껴두고 오늘도 내일도 내가 다 먹어야지.


섬마을 고향 집 뒤꼍 조그만 텃밭에는 앵두, 대추, 무화과, 단감나무가 한 그루씩 있었다.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에 할아버지가 심은 라 나무들은 키가 컸다. 무화과나무는 거목이 되어 지붕을 넓게 덮고, 그 위로도 한참이나 더 솟아 있었다. 먹을거리가 적었던 낙도에서 뒤꼍에서 열리는 과일은 귀하디 귀한 한정판 명품 간식이었다. 앵두 철에는 학교가 파하자마자 달려가 붉은기가 조금이라도 보이는 앵두를 샅샅이 찾아 홀랑 입에 넣었고, 봄엔 감꽃 따 먹는 재미에 가방을 던져 놓고 뒤안 문부터 열어젖혔다.


무화과 철이면 아침마다 어른들이 나를 지붕 위에 올렸다. 기와를 살살 밟고 이리저리 무화과 가지를 헤쳐가며 쩍쩍 벌어져 꿀이 흐르는 무화과를 몇 바구니씩이나 땄다. 지붕이 망가질 수 있어 어른들이 올라가는 일은 드물었다. 날마다 따는데도 아침이면 새롭게 익은 것들이 그렇게나 또 생겨나는 게 요술처럼 신기할 따름이었다. 너무 많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는 심부름도 도맡아 했다.


거두는 무화과 양이 줄어들 무렵이면 감이 익기 시작했다. 현희네 집에 놀러 갔더니, 현희 할머니가 장독대에서 소금물에 우려 놓은 감을 내어 주었다. 어른 주먹보다도 훨씬 컸다. 우리 감이랑 크기가 비교가 안 된다. 현희가 항아리감이라며 우쭐댔다. 다 익기 전에 떨어진 것은 주워 이렇게 소금물에 담가 떫은 기를 빼내고 먹는 거란다. 장독 안에는 감이 가득 들어 있고, 커다란 감을 무겁게 매달고 있는 나무가 하나도 아니고 여러 그루가 줄줄이 버티고 있다. 부러워 죽을 지경이었다. 바로 먹지 않고 보관해 놓는다고? 참을성도 많은 사람들이다. 실컷 먹고 나서는 '우리집 단감은 소금물에 안 우려도 되고, 너네 것처럼 무르지도 않고, 맛도 훨씬 좋다.'고 현희한테 쉰 소리를 하고는 우리 집 감나무한테 달려갔다.


감 씨알이 굵어지면 주황빛이 보일락 말락 하기 시작한다. 아직 초록색이어도 하나 따 맛을 보면 벌써 달고 아삭하다. 까치발을 들거나 폴짝 뛰어 손이 닿는 데에는 이미 열매가 남아 있지 않다. 감나무 둥치를 붙잡고 원숭이처럼 기어 오른다. 위쪽에 있는 가지 사이에 다리가 닿으면 지지대 삼아 몸을 끌어올린다. 굵은 가지를 딛고 서서 낭창한 가지를 당겨 감꼭지를 돌려 딴다.


앗! 따거! 아픈 데를 감싸 쥐고 주저앉아 고통을 견딘다. 눈물이 찔끔 난다. 날마다 쐐기에 쏘인 자국이 늘어난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 녀석들은 어디서 자꾸 나타나는지. 벌에 쏘이는 것보다 아프지만, 벌게져 부풀어 오른 팔뚝에 침 한번 바르고는 참고 만다. 약 발라주고 호호해 줄 어른은 없다. 괜히 말했다가 나무에서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리 감푸냐고 혼이나 날 터였다. 나무에 올라가도 손이 안 닿으면 최후의 수단인 긴 작대기를 쓴다. 정확한 조준과 위치 선정, 아기 다루듯 세심한 손놀림이 있어야 감이 상처를 덜 입는다. 그러고 나서, 고개를 쳐들고 자랑스런 누나와 감과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다리는 동생들과 함께 야금야금 먹는다.


목포 외삼촌 댁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추석이 되어 집에 왔다. 집 옆 우물에서 동네 아주머니 여럿이 빨래를 하다 나를 보고는 깔깔거린다. 내 얘길 하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여태까지 너네 집 감나무는 열매가 안 열리는 나무인 줄 알았더니, 너가 중학교 가고 나서야 감이 익는 걸 본다"며 웃는 것이다. 뒤돌아 보니 지붕 위로 살랑살랑 흔들리는 초록 잎사귀들 사이에 주홍빛 동그라미들이 한 알 한 알 화려하게 가을을 색칠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자기 빛깔을 찾은 고향집 감나무가 기다렸다고, 객지서 고생한다고, 감이 익기도 전에 모조리 따 먹어 버리던 말괄량이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다시 가을이 왔다. 지금도 시댁에 가면 아직 시푸른 감을 똑 따서 소매에 쓱쓱 닦아 와작와작 먹어치운다. 남편은 그 떫은 걸 왜 먹냐며 어이없어하고, 시어머니는 우스운지 어린아이 보듯 웃는다. 어머니도 배탈이 날 때 떫은 걸 먹으면 좀 나아진다며 나를 두둔한다. 그렇다면 나는 너무 먹어서 변비가 생기겠다고 킥킥댄다.


이젠 먹을거리가 풍부하다. 잘 익어 맛난 게 지천이건만. 가을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떫고 텁텁한 감 과육을 입안 가득 채우고, 오물오물 가난하지만 자유로웠던 어린 시절을 음미하며 삼킨다. 다람쥐처럼 날쌔고 겁 없이 온 동네와 들판과 바다와 산을 쏘아다니던 드센 여자애가 감나무 타고 올라간다. 어이, 거 잎사귀에 쐐기 조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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