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장 후회하는 것도 회사를 그만둔 것
“엄마, 00 엄마는 변호사래!”
“엄마, &&엄마는 의사래!”
“엄마,** 엄마는 시청 공무원이래”
“엄마, —엄마는. 대학에서 교수래. “
“엄마, ## 엄마는 삼성에서 일한데.”
어렸을 때는 ‘우리 엄마는 나랑 함께 있어, 부럽지?’라는 표정으로 한껏 어깨에 힘을 주고 다녔던 아이들이, 사춘기를 앞두고 부쩍 주변 친구 엄마들의 직업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조금 위축된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내가 느끼는 자격지심일까?
맘카페에 종종 나와 같은 고민과 서운함을 토로하는 엄마들의 이야기가 올라온다. 어린 핏덩어리 누구한테 맡기기 싫어서 다니던 회사 그만두고, 일도 그만두고, 소위 말하는 경력단절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는데, 아이들이 초등학생만 되어도 일하는 엄마들이 돈도 벌고, 그럴듯한 직업도 가지고 있는 것을 부러워하는 것을 보면, 육아에 헌신했던 자신의 지난 몇 년간이 허무하게 느껴지고 속상하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버티는 자가 역시 진정한 승자라는 생각이 든다.
마음속으로 한 번 외쳐본다.
‘이 녀석들아! 니들이 그렇게 엄마 붙들고, 엄마 없으면 안 될 것 같이 굴었던 그때는 기억 못 하는 게냐!!!’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나는 친구들에 비해 결혼을 조금 일찍 했다. 서울문화재단에서 대리를 막 달았던 그때, 나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뭐 대단한 직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동종업계에서는 나름 안정적인 직업이기도 하고, 성장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결혼을 하더라도, 출산을 하더라도 당연히 일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때만 해도 아이 때문에 일을 그만두었다고 말하는 선배들이 루저처럼 느껴졌고, 나는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결혼 후 1년 동안은 잘 버텼다. 결혼만으로 내 생활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었다. 조금 늘어난 집안 살림, 집안 행사 등은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러나 출산은 이야기가 달랐다. 누가 대리로 엄마 역할을 해 주지 않는 한 회사생활은 말 그대로 불. 가. 능이었다. 육아휴직 기간 동안 좋은 시터, 좋은 어린이집을 위해 열심히 기도했다.
“주님, 좋은 시터, 좋은 어린이집 만나게 해 주세요!”
그런데…… 기도응답이란 것은 늘 그렇게 ‘주세요-옛다!’로 끝나지 않는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그러셨다. 나를 이해시키시고, 설득시키시고, 내 마음을 움직이신다. 그때 우연히 본 어느 목사님의 칼럼이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당신의 아이들을 돌봐주는 아이돌보미, 친척, 조부모님들은 아이를 어떻게 양육했는지에 대하여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우리는 만들 터이니 당신들이 키우라.” 나는 그러한 태도를 볼 때마다 움츠리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시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이 문구를 보는데, 내 마음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만큼 좋은 양육자가 있을 수 있나?’
결국 육아휴직이 끝나고 퇴사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그렇게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딱 3년만 집에서 양육하고, 그 이후에는 어디든 재취업을 해 보리라 생각했다. 그때는 그렇게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20대였다.
그러고 나서 3년, 4년, 5년 …… 둘째까지 키우다 보니 여전히 아이들은 어렸고, 엄마손을 필요로 했다.
더 큰 문제는 30대가 된 이후에는 이전과 같은 수준의 직장에서는 나를 더 이상 받아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흘러간 곳은 우리 부모님의 작은 자동차 정비공장 경리직이었다. 그나마도 딸이니까 받아주지, 딸이 아니었으면 취업도 못했을 것이다.
가끔 페이스북 알림으로 서울문화재단에서 하는 행사들의 알림이 뜬다. 아이들 어릴 적에는 계속 연락하던 사람들도 있고, 아이들도 놀 수 있도록 종종 행사에 참가했었다. 한동안 바쁘다는 핑계로 행사에 참가 못 했었는데, 오랜만에 미술교육 프로그램이 눈길을 끌었다. 우리 둘째가 그리기를 워낙 좋아하고, 엄마가 보기에는 예술적인 감각이 다분히 있어 보이는 아이라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신청을 했다. 딸과 단둘이 대학로 길에서 행사장까지 설레는 마음으로 걸어갔다.
“엄마 회사가 여기에 있었어?”
“엄마 다닐 때는 청계천 쪽에 사무실에 출퇴근했는데, 행사들을 여기저기서 하다 보니 대학로에서도 하고, 시청에서도 하고, 서울시 곳곳에서 했지.”
“그래? 여기도 왠지 재미있는 게 많은 것 같아. 엄마랑 데이트하니까 좋아!”
서울문화재단 대학로 센터에서 아이가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안 공간을 한 군데 한 군데 둘러보았다. 혹시라도 아는 사람을 마주칠까 긴장했는데, 세월이 많이 흘러서인지 이제는 아는 사람도 없다.
예술프로그램 수업을 마치고 아이와 함께 행사장을 나오려는데,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같은 해 입사했던 동기였다. 사원증에는 000 팀장이라고 적혀있었다. 세월이 흘렀지만 얼굴은 별로 변한 것이 없었고, 노련함과 카리스마의 아우라는 확실히 세월을 속일 수 없었다.
“어머… 혹시 000 씨”
“앗, 영주 씨 오랜만이에요! 딸이에요? 벌써 이렇게 컸어요? 우와! “
“네, 000 씨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이제 팀장님도 되시고~”
“어우, 영주 씨도요. 애기 엄마인지 모르겠어요. 호호. “
서로의 덕담으로 화기애애하게 인사를 마친 후 다음 기회를 기약하며 행사장을 나왔다.
아마도 내가 여기서 버티고 있었다면 나도 팀장 정도는 하고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두둥실 떠 오른 그때, 우리 딸이 무엇을 느꼈는지 갑자기 나에게 물었다.
“아니, 엄마! 엄마는 왜 도대체 서울문화재단을 그만둔 거야?”
”응…? “
아니, 이 아이의 눈에는 여기가 뭐가 좋아 보였나? 뭔가 있어 보였나? 아니면 팀장님으로 일하는 내 동기의 모습이 멋져 보였나?
그 물음에 대해 딱 하고 떠오르는 답은 하나였다.
“그냥, 윤호 다혜랑 함께 있고 싶어서. 엄마가 너희 애기 때 회사 갔으면 너희랑 함께 있을 수 없었잖아.”
그 대답을 들은 딸아이는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아~ 그렇구나~”
라고 쿨하게 답해버린다. 아마도 나의 대답이 이 아이에게는 꽤나 만족스러운 대답이었나 보다. 그리고 그날 딸내미와 인생 네 컷도 찍고, 대학로 맛집도 가고, 캐릭터샵도 돌아다니며 즐겁게 데이트를 했다.
집에 와서 다시 곰곰이 딸아이의 질문에 스스로 답해 보았다.
아이를 키웠던 시간은 고통스러웠다. 내가 살면서 맡아본 직무 중 가장 감당하기 어려운 직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시간은 나에게 소중한 보물이다. 아이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아이가 다른 멋진 타이틀을 갖고 있는 엄마들을 부러워한다 해도,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냥 그 시간은 나를 위한 선물이었다. 내가 그 작은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하고 일에 전념했어도 마찬가지로 후회했을 것 같다.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을 이끌고 평일이면 매일 놀이터, 공원을 들쑤시고 다녔다. 가방에는 간식거리며, 여벌 옷이며, 보온병이며 한가득 싣고 아이들을 쫓아다녔다. 혹시라도 아이가 다칠까, 사고 칠까 두 눈과 뒤통수의 레이더는 항상 아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놀다가 갑자기 아이가 쉬 마려워라고 할 때는 머릿속은 긴급경보로 사이렌이 울렸다. 공원에 토끼나 다람쥐가 보일 때면 아이가 혀 짧은 소리로 “토찌! 다담찌!” 외치며 달려갔고, 나는 그 아이를 또 쫓아 달려갔다. 그렇게 하루종일 놀다 집에 돌아와 저녁을 준비해 먹이고, 아이들 씻기고 재우던 일상. 그때는 하루하루가 힘들기만 했다. 시간은 또 얼마나 더디게 가던지……
참 신기한 것은 함께 한 시간 동안 찍은 사진은 한 장 한 장 보면서 그때 기억이 새록새록하고 행복한 기분이 드는데, 어린이집이에서 보내 준 사진은 잘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사진 한 장에는 그때 아이와 함께 했던 공기, 마음, 감각 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누군가 물어보았다.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가장 후회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가장 잘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퇴사를 하고 아이들의 영, 유아기를 전적으로 내가 지켰다는 것이다. 아이들을 위해서 그것이 최선인지는 모를 정도로 나는 좋은 엄마는 아니었다. 서툴고, 모르는 것 투성이었다. 아이에게 화도 자주 냈다. 살림도 엉망이었다. 엄마로서의 평가는 아이들에게 맡길 일이다. 그러나, 그 시간은 나를 위한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보낸 시간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 시간들은 나에게 추억이고 지금의 나를 만들어 냈다. 지나고 보니 아이들이 그렇게 빨리 크게 될 줄 몰랐다. 아가의 모습을 한 아이들이 이렇게 금세 커버릴 줄은…… 그 아가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런데 동시에 후회하는 것도 회사를 그만둔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복직을 하고 버텨낸 엄마들은 그때에 비해 근로 조건도 훨씬 더 좋아졌다고 한다. 그때 그렇게 야근과 격무에 시달렸었는데, 지금은 분위기 자체가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아이가 아주 어린 고 시기만 버티면 우리 아이들이 자랑할 만한 엄마가 되었을까, 우리 가계도 조금 더 여유로웠을까, 집 장만은 할 수 있었을까, 내가 방황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만약 이제 막 출산을 계획하고 있는 후배들이 나에게 어떠한 조언을 구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엄마가 아이의 아기 때를 놓치지 말 것을 권하고 싶다. 아이를 위해서 엄마가 희생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그 시간은 엄마를 위한 보물 같은 시간이 된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동시에 복직을 결심하는 엄마가 있다면 격려해 주고도 싶다. 버티고 버티면 좋은 날이 오기도 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선택은 있을 수 없다. 다만 무엇이 조금 더 나은 선택인가 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그렇다면 후회보다는 내가 한 결정을 믿고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오늘 하루를 살아보는 것은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