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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리카 May 11. 2023

시댁이 불편한 새댁에게

원래 남과 가족이 되는 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요즘 맘까페를 들어가 보면 깜짝 놀라는 글들을 종종 보게 된다.

‘시’가 불편한 것은 백번 이해하는데, 종종 자신의 시부모를 동네 어르신보다 못한 존재로 인식하는 새댁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치 못하다. 갓 결혼을 한 새댁에게 시부모의 일거수일투족, 한마디 한마디가 예민하게 받아들여지고, 거슬리는 때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어디 시부모뿐인가? 시가 형제들은 어떠한가? 손 아래든, 손 위든, 남이든, 여이든, 시가 식구들과 한순간에 가족이 된다는 사실은 여간 받아들이기 불편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남이 가족이 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하는 것이다.


나는 올해로 결혼 14년 차이다. 27세…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는 나 혼자만 생각하던 굉장히 철이 없던 시절이었다. 남편은 좋지만, 그런 남편의 인격과 삶을 형성한 그의 부모의 존재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결혼을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고, 결혼 직후에도 시가의 모든 말 한마디가 나에게는 부담으로, 나아가서는 분노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존경받는 장로님, 권사님이셨던 우리 시부모님은 대외적으로는 천사 같은 분들이셨다. 그러나 시부모님 으로써는 여간 까다로운 분들이 아니셨다. 연세도 우리 부모님보다 한세대가 많으셨기 때문에 철없는 며느리의 일거수일투족이 못마땅하셨던 것 같다. 아무튼 하나하나 열거하기는 어렵지만 결혼 초에는 시가의 보수적인 기준 때문에 몰래 이혼까지 생각할 정도였으니.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다.

어머님이 결혼 직전부터 나에게 하셨던 말씀 중 가장 부담스럽고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이야기는 성경의 룻기를 이야기하실 때였다.


“내가 항상 기도하기를 룻 같은 며느리, 딸 같은 며느리를 보내달라고 했는데. 정말 딸 같은 며느리를 얻은 기분이야. 룻 같은 며느리, 딸 같은 며느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

아마도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라면 우리 어머님의 말씀이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 감동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뭐야, 룻같은 며느리면, 남편이 죽어도 어머니를 모시는 그런 며느리를 말하는 거야? 딸 같은 며느리는 또 뭐고. 그럼, 나보고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어머님을 모시라는 거야? 뭐야?’

27살이다! 한창 내 일을 갖고 앞으로 나만을 위해 길을 개척하기에도 생각이 벅찬 시기이다. 시댁을 위한 희생? 남편을 위한 헌신? 결혼을 하게 되면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는 나의 처지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친정 부모와의 균형도 나에게는 예민한 문제였다. 명분을 중요시하는 시댁과 실리를 중요시하는 친정 사이에 늘 경제적, 정서적 편차가 존재했고, 그 균형이 깨질 때마다 속에서는 열불이 났다.

왜 우리 엄마, 아빠만 손해를 봐야 하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해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하고 속앓이만 했다.


시간이 지나고, 14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 많은 세월을 거치니 내가 불편해했던 시댁의 가풍, 철학, 태도 등은 내가 좋아한 그를 만드는 토양이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시가에 대해 화가 났던 모든 포인트의 중심에는 그들을 나의 가족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 보면 타인을 가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다. 조금 극단적일 수는 있으나 새엄마, 새아빠를 맞이하는 것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이질감이 아닐지 생각해 본다. 일단 내가 왜 갑자기 누군가를 어머니로 불러야 하고, 또 어머니로 공경해야 하는지 받아들이기 힘들다. 아직 나의 엄마는 내 친정엄마 하나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제도 마찬가지이다. 나에게는 시누이가 셋이 있다. 내 동생과도 가끔은 맞지 않아 다투기도 하는데, 하물며 갑자기 누군가를 언니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물론 나의 이야기가 시가를 내 가족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시’는 ‘시’다.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있고, 조심스러운 부분이 있다. 그 선은 분명히 지키되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결혼 초반 시누의 한마디 한마디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무언가 조언을 하면 ‘그럼 내가 못한다는 거야?’라는 생각이 들고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해를 거듭할수록 같은 말을 들어도 화가 덜 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 말의 배경을 이제는 이해하게 된 것 같다. 마치 친언니였다면 ‘우리 언니 원래 그러잖아!’라는 생각이 드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당신을 며느리로 또는 올케로 받아들여야 하는 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결혼 후 5년 뒤, 남동생이 결혼을 하게 되었고, 나에게는 올케가 생겼다. 올케는 싹싹하고 부지런하고 인상도 매우 선했다. 나무랄 데 없는 올케였지만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친정엄마가 올케를 칭찬하면 묘한 감정이 생겼다. 질투심인지 뭔지 모르는 기분에 휩싸여 올케를 대할 때 웃는 게 웃는 거 같지 않았다.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우리 형님들도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겠다고 말이다. 나 역시 올케를 우리 식구로 마음 깊숙이 받아들이는데 까지 시간이 꾀 걸렸다.


시가에 대한 스트레스, 갈등은 일방적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쌍방의 노력이 필요한 부분이다. 서로의 노력이 십 년 이상 쌓이면 그게 가족이 된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우리 시부모님은 매우 까다로우시다. 시누이들 모두 감각이 예민한 사람들이어서 세상 둔한 나 같은 사람이 그 기준을 맞추기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그런 나도 노력이라는 것을 해 보았다. 그렇게 오랜 세월이 흐르니, 그들의 섬세함을 배운 것이 나에게도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리고 남편의 섬세함이 바로 그런 배경에서 온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반대로 나의 둔함을 시댁에서도 이해해 주기 시작했다. 섬세하지는 않지만 그래서 항상 큰일 앞에서도 덤덤하고, 빠르고 시원시원하게 결정하고 일처리를 하는 것에 대해 인정해 주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 남편 역시 우리 집안의 그런 시원시원함이 사람을 편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원래 너무 다른 사람과 가정이 만나 가족이 된다는 것은 불편한 일이다. 내가 왜 상대방에 맞추어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도 있다. 그러나, 가족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노력도 필요한 일이다. 물론, 이해할 수 없는 시가도 있고, 며느리도 있다. 노력이라는 것이 무조건적으로 맞추고 무리해서 잘하는 것만은 아니다. 조급해하지 않고, 시간을 기다리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오랜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새댁들이여... 시부모님이 밥 한번 같이 먹자고 하는 게 화가 나는가? 명절에 시가에 가서 부엌일을 하는 것이 억울한가? 원래 새로운 가족이 생긴다는 일은 불편한 일이다. 불편함을 불편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족하다. 화를 내 봐야, 억울하다고 해 봐야 소용없다. 하나의 역할이 확장된 것을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새로 가족이 되는 것인데, 밥 한번 먹을 수도 있고, 여행 한 번 갈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명절에 모여 밥 한번 같이 해 먹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너무 잘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하나씩만 해 나가자. 어버이날에는 기분 좋게 용돈도 드려보고, 여름에는 같이 여행도 한 번 가보고, 명절에는 음식도 해 보고. 과제 하나씩만 차근차근히 해 나가면 된다. 세월이 흐르면 어느덧 시가가 나의 삶의 한 부분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가족이 되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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