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 장 피에드포르 : 순례의 시작

산티아고 순례길 D-0

by Dorritos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순례길의 민낯을 본다. 늦게 오는 바람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체육관 같은 바닥에서 침낭을 깔고 자야만 했다. 샤워실이 없어 씻을 수 없었지만 화장실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만약 여길 혼자서 오게 되었었다면 조금 무서웠을 것 같다. 나 말고도 5명이 더 있기 때문에 든든하고 전혀 무섭지 않다. 자는 동안 물건을 도둑맞지나 않을지 그런 점이 두렵기는 하다. 이 체육관에는 약 15명 정도가 모여있다. 얼마나 피곤했는지 그 사람들의 하루를 이해할 순 없겠지만 코를 고시는 분들이 많은 것을 보면 확실히 피곤했나 보다. 옆에 누워 계신 스페인 할아버지가 침낭 속에서 방구끼는 소리가 들린다. 동료들의 키보드 소리도 들린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엎드린 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린다. 현재 시각 11시 55분, 버스를 타고 도착해 밥을 먹으니 이 시간이 되어 버렸다.


KakaoTalk_20230714_175041892_02.jpg 이곳 사람들은 타인의 시선은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옷을 훌러덩 벗고 또 갈아입었다. 나는 종종 눈을 질끈 감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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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가 간절히 바라던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 시작을 앞두고 이런 곳에서 자다니 정말 한순간에 순례자가 된 듯한 기분이다. 진짜 순례를 하기 위해서는 비움과 비움으로부터의 만족이 있어야 한다. 그전에는 소비하고 먹고 편안한 잠자리에서 잠들었다면 이제는 그 생활에서 많은 요소를 바꿔야 한다. 짐을 최대한 비움으로써 마음도 같이 비워져야만 한다. 여기서 얻는 만족은 외부적이고 세속적인 즐거움으로부터 얻는 만족과는 다른 부류여야 한다. 작은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주신 이 자연을 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순수함을 가져야 한다. 내가 소유한 것들, 나의 겉모습으로 내가 결정되는 이 세상에서 벗어나 내면으로부터 진정한 나의 존재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이제 6시간만 있으면 이곳을 떠난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을 넘을 거다. 길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지 궁금하다. 어서 잠에 들고 싶다. 일어나자마자 짐을 챙겨 나갈 것이다. 신선한 새벽 공기를 깊게 들이마셔야지. 이번 여정만큼은 모든 표면적인 걱정에서 떠나 본질적인 고민을 해봐야지. 내일은 생각하면서 걸을까 아니면 생각 없이 걸을까? 벌써 재밌다. 내 인생은 너무 재밌는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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