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의책 한국 산문선
노동의 풍경과 삶의 향기를 담은 내 인생의 문장들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한테 온 산문선 '나는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글을 읽는 내내 입은 웃고 눈은 우는 기이한 모습을 연출하며 나도 아주 아주 천천히 울기 시작했다.
이제, 우리도 좋은 산문 선집 한 권쯤은 가져도 괜찮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에게 삶의 생생한 현장을 담은 산문집은 참 드물었다.
그러나 좋은 작가, 좋은 글은 무척 많다.
그들을 한자리에 오롯이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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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과 삶과 내면의 풍경을 담담하고 유쾌하게 풀어냈다.
특히 사라진 것, 잊혀진 것, 기억해야 할 것들을 꾹꾹 눌러서 담았다.
그 글들은 눈으로 보아도 좋았고, 소리 내 읽어도 좋았다.
고향과 가족을 다룬 글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 때의 고행과 그 때의 가족이란, 추억과 기억이 녹아든 구체적인 장소와 사람이면서, 또 그 단어로 상징되는 소중한 것이기도 했다. 지금은 사라졌어도 한때는 분명 존재했고, 그 기억과 경험 때문에 오늘을 사는 힘과 위로를 받는 그것. 또 그 시기 동안 벌어진 사회적 사건들과 직접 관련된 글이 많았다. 4대 강 개발사업에 반대하는 글, 용산참사에 분노하는 글, 대추리와 밀양 등 사회 곳곳에서 벌어진 또는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 기록한 글들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유독 음식을 다룬 글이 많다는 점이다. 전면에 등장하거나 중요한 매개체로 음식을 등장시킨 글이 많았다. 작가의 스펙트럼도 넓고 다채로웠다. 강진에서 농부이자 활동가로 일하는 강광석, 보성에서 우체부로 일하는 류상진, 퇴곡리에서 농사를 짓는 유소림, 농사짓는 소설가 최용탁이 있다. 직접 몸을 움직여 일하며 생활하는 아들의 글은 울림이 크고 깊다. 관념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공감대를 만들어 가고 있기에 더욱 그런 것 같다.
-편집자 서문 중-
성석제의 나의 산타클로스는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잔잔한 감동이다. 어릴 적 가난한 시골아이에게 산타클로스의 성탄 선물은 '목멤'이라고 한다. 작가에게 진짜로 선물을 주는 산타클로스가 있었으니 대부님인 나자로이다. 몸이 불편하고 가난했던 나자로는 성탄 이브만 되면 느린 걸음으로 대자녀인 소년의 집에 온다. 작가는 자는 척하다가 아버지가 깨우는 소리에 짐짓 깬 척하며 눈을 비비고 앉는다.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하며 선물을 받고 다시 잠에 빠져든다. 이틑 날 뜯어본 선물은 문둥이 연필이라고 부르는 질 나쁜 연필 한 통이다. 아이들도 부러워하지 않는 선물이어서 화가 난다. 작가가 스무 살 무렵에 돌아가신 대부님 나자로. 작가는 진짜 산타클로스인 나자로를 떠올리면 어린 시절, 환히 전깃불이 들어온 성탄목을 볼 때처럼 목이 메어오곤 한다. 그 목멤을 작가는 그의 선물이라고 여긴다. 덩달아 나도 목멤이라는 선물을 받는다.
최성각의 달려라 냇물아는 어린 시절 병아리를 샀다가 죽어 나갈 때 통곡한 나의 눈물이 생각난다. 작가는 돼지 농장을 하는 아버지를 유난히 좋아했기에 궂은 일인 꾸정물 거두는 일도 불평 없이 충직하게 도왔다. 어미 돼지가 새끼를 낳았는데 열두 개의 젖꼭지 수보다 한 마리 더 많이 낳았다. 그러니 그중 제일 약한 새끼 돼지는 단지 약하다는 이유로 냇물로 휙 던져버리는 아버지를 보며 큰 충격을 받는다. 저녁 식사 후 조용히 집을 빠져 나와 40년 전 지방 소도시의 캄캄한 어둠을 헤치고 새끼 돼지를 찾으러 나섰다. 화장실도 혼자 못 가는 겁쟁이 쫄보인데 방둑을 지나 무성한 수풀을 헤치고 그 소년은 새끼 돼지를 건지겠다는 뜨거움으로 미쳐 있었다. 옷이 찢어지고 피도 났지만 기적처럼 새끼 돼지를 만나서 구조했다. 그 순간, 끝까지 살아낸 어린 생명에 대한 벅찬 반가움과 기쁨은 이후 다른 어떤 순간에도 다시 느낄 수 없다고 고백한다. 작가를 환경운동을 하는 글쟁이로 살아가는 것은 아마 어린 날의 새끼 돼지 사건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박성대의 소이야기는 소띠인 나에게 지난한 아픔과 애정을 주었다. 일평생 이 세상 짐승이라고는 소와 소 아닌 것들으로 구분하던 울할매의 소사랑은 눈물겹다. 할매에게 소는 짐승이 아니라 사랑을 주고받는 반려우 그 이상이었다. 엉덩이 비쩍 마른 거칠한 송아지도 울 할매 손길 한 철만 닿으면 어느새 통통하게 살 차오르고 털빛도 고운 생판 다른 소가 되는 걸 보면 할매의 소에 대한 정성은 종교적이다. 저승 도솔천에서도 순한 소 몇 마리 돌보고 계시는지.
그 시절 소는 집안의 가장 큰 재산이며 농사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존재였다. 소도 앓아눕는 한여름 징한 농사철에 큰 눈망울에서 눈물을 흘리는 그 놈들을 보면 사람도 소도 그 세월 어찌 지냈는지 한숨이 난다. 나도 어릴 적 외갓집에 가서 동네 아이들과 함께 뒷산으로 소꼴을 먹이러 간 적이 있다. 그 때 아이들은 상일꾼이었고 소꼴을 먹이는 것이 큰 임무였다. 소죽을 끓이느라 펄펄 끓는 문간방에서는 서리한 김치와 고구마를 먹으며 깔깔대는 웃음소리에 보름달도 기웃거리며 동지섣달 긴긴밤은 깊어만 갔다. 소이야기는 해도해도 끝이 없는 작가와 나의 유년 시절의 화수분이다.
하종강의 고문이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인간의 예의였고, 이대근의 우리는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는 죽음의 공포가 연탄가스처럼 스며드는 이 조용한 사회에서 죽을 각오로 살아가야 함을 이야기한다. 그렇게 해서 당신만이라도 살아남기를 바란다. 노순택의 송경동이 시를 쓰기 힘든 시대, 그 시간 정태춘은 노래하지 않았다를 읽으며 화가는 그리지 않고, 시인은 낭송하지 않으며, 가수는 노래하지 않는 부조리한 시간에 대한 분노로 내 마음은 납덩이가 된다.
달려라 냇물아
살아간다는 것
갈 곳이 아무 데도 없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
4개의 소제목 속의 작은 이야기들은 결코 작지 않다.
울고, 웃고, 추억하고, 분노하고, 절망하고, 희망하고...
이 책은 그렇게 생겨 먹었다.
이 책은 그렇게 스며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