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막둥이 딸은 체육에 천부적인 소질이 있었다.
중고등 학창 시절에 남녀 모두 합해서 달리기는 1등이요.
멀리뛰기에 발군의 실력을 보여 체육선생님으로부터 체대 진학을 적극 권유받기도 했다.
그 당시 체대생들의 선후배 간의 엄격한 서열로 인한 폭행 등이 큰 사회적 이슈가 되어 연일 매스컴을 달구고 있었다. 막둥이가 엎드려뻗쳐, 우로 뒤집고 좌로 뒤집고를 하는 것이 상상되니 등골마저 오싹했다..
체대는 절대 안 돼!
어릴 때부터 자기 머리는 자기가 묶고 땋고 자르기까지 하는 등 손재주가 있었다.
친구들 머리도 아주 요상하게 말아주고 꼬아 올려서 제법 그럴듯한 창작의 부산물을 얻어냈다.
헤어 디자이너가 될 거야.
호기롭게 출사표를 던진다.
그 당시 단골미용실 원장님이 고무장갑을 아무리 껴도 펌약때문에 손바닥 피부가 벗겨지고 너무 안좋아 미용실을 접으려고 하였다. 하루종일 서서 손님들 상대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 지 셀 수도 없이 많이 들었기에 내키지 않았다. 세상에 힘들지 않은 일이 어디에 있겠냐마는 곱게 기른 딸이 고생하는 것이 뻔한 그 길을 가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헤어 디자인과도 안돼!
엄마의 마음은 도통 알려고 하지 않으면서 친구들에게는 '엄마'라는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고민 상담을 잘했다. 친구 엄마들까지 친구들이 힘들게 하면 막둥이에게 상담을 청해 오는 오지랖의 끝판왕이었다.
쳇! 지 엄마한테나 잘하지?
질투인 지 서운함인 지 입만 삐죽거려진다.
그래, 상담심리학과를 가라.
그런데 진로를 정했다고 그냥 진학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공부에는 그다지 소질도 취미도 소질도 끈기도 없다는 것이 부아가 치밀고 속상하다.
쟤는 돌연변이야. 병원에서 바뀌었나??
그렇게 주장하기에는 우리 둘의 얼굴은 너무 많이 닮았다. 누가 봐도 내 딸이 분명하다. 웁스!
상담심리학과도 힘들겠는데...
막둥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이 나의 교육대학 동기이다.
그 친구를 만날 겸 학부모로서 정중하게 교실을 방문했다.
교탁에서 교실 뒤 작품게시판을 보니 미술의 장르 중 구성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구성의 창의성과 색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 눈에 띄었다.
가까이에 가서 보니 헉! 우리 막둥이 작품이다.
그 기억 하나를 의지하고 믿으며 나는 선포한다.
그래, 미대, 너로 정했어!
엥? 갑자기 웬 미대?
온 가족이 놀랐고 막둥이는 벌써 고개부터 절레절레 젓는다.
나 미술에 소질 없어 자신 없다고.
아냐, 너 6학년 교실에서 제일 잘 그린 작품이 바로 니꺼였어.
엄마도 미술에 조금 재능이 있잖아? 색도 잘 쓰고?
아~뭔 소리야~
그거야 어쩌다 얻어걸린 거고.
미대가 애들 장난이야? 초등학교 때부터 미술학원 다녀도 들어갈까 말까 한다고.
근데 고2인 나보고 바로 미대를 가라는 건 문과인 나보고 이과가라는 것만큼 말도 안 되는 말이라고~
예상대로 거센 반발이 있었지만 난 알았다.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하기 두려운 거라는 걸.
막둥이도 미대에 대한 로망이 있다는 걸.
그러기에 나는 밀어 부쳤다.
미대 옆에 의대가 있다잖아.-
오다가다 의대생 하나 만나서 결혼하고, 직업을 갖지 않더라도 너네 집이라도 세련되고 멋지게 꾸미고 살 것 아니야?
사실은 엄마의 꿈이 미대생이었거든.
가정 형편 상 미대를 못 가고 교대를 갔지만 늘 미대에 대한 동경이 있어.
어이상실이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의 말이 곧 법이며 더 이상의 저항은 부질없음을 아는 태도로 묵묵히 나의 결정에 순응했다.
검증되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정보와 매우 부끄러운 속물근성이 초래한 조악한 폭력이었다.
잘못된 로망과 신념으로 못다 이룬 나의 꿈을 자식을 통해 이뤄 보려는 최악의 엄마 역할에 충실했다.
하지만, 나는 바로 미술학원에 등록했고 막둥이는 얼떨결에 예술인의 길로 들어섰다.
지금도 가끔 투덜댄다.
나같이 착한 딸이 어디에 있어? 엄마가 번갯불에 콩 볶듯이 정해진 미술의 길을 단 하루의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따랐잖아? 내가 공부와 미술학원을 병행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방학이면 하루 종일 미술학원에서 살고 밤에는 입시학원 가고. 그 시절 생각하니 끔찍하네.
난 우리 막둥이가 미대생인 것이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
캔버스를 들고 캠퍼스를 누비는 너의 모습을 상상하면 전율이 느껴져.
마치 내가 이팔청춘 미대생이 된 것처럼 말이야.
막둥이는 디자인 회사에서 야근에 치이고 격무에 쩔어 산다.
게다가 박봉이다.
물론 의대생을 사귄 적도 없으니 의사 사위 얻어볼까 하는 나의 흑심도 다 허사가 되었다.
이제는 어느 놈이던 델꼬만 오면 일초 내에 오케이 사인을 내릴 준비를 하고 있다.
그런데...
막둥이가 아주 아주 비협조적이다.
그때 체대에 갔더라면? 헤어 디자인과를 갔더라면? 재수할 생각하고 상담심리학과를 지원했더라면?
지금보다 더 편하고 쉽게 살 수 있으려나?
혹시 그 길에서 운명의 짝이 기다리고 있었으려나?
막둥아.
지금의 길이 너의 길이 맞긴 한 거니?
엄마의 얇디 얇은 선택으로 너의 운명이 잘못 바뀐 건 아닌지?
엄마가 미안하다.
너의 길을 잘 가고 있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