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녀와 산책

수원화성 한 바퀴

by 에쩨르

요즘 방학을 맞은 손녀와 놀고 있습니다. 민족중흥의 사명이라도 되는 양 줄곧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바람이라도 좀 쐬주고 싶은데 도통 말을 듣지 않습니다.


“소원아! 산책 가자. 오늘은 구름 차일이 햇볕을 가려주고 있으니 성벽 따라 한 바퀴 걸어볼까?”
“싫어요!”
“아따, 그러지 말고 가자. 너는 예쁘게 생긴 게 말도 잘 듣더라. 오는 길에 너 좋아하는 치킨 사줄게”
“싫다고요! 나한테도 안 갈 자유가 있다고요. 할머니는 왜 자꾸 싫다는 일만 시키세요?”
“자유라는 말은 그럴 때 쓰는 게 아니거든. 좋은 일은 일부러라도 해야 된단다 .”
“그러니까 혼자 가시라고요. 할머니는 손녀 싫어하는 일만 시키는 독재자예요.”
“흐미, 이것이 뭔 소리? 눈 나빠지든 말든 게임하라고 내버려 두는 것이 나쁜 할머니지, 나 지금 좋은 할머니 되려고 엄청 애쓰고 있거든.”
그 뒤로도 한참 입씨름을 하다 “엄마한테 전화한다”는 마지막 카드까지 쓰고서야 밖으로 나왔습니다.


창룡문 긴 의자에 앉으니 바람이 시원해 콧노래가 절로 나옵니다. "소원아! 6.25 때 성곽이 많이 무너졌잖아. 그중에서도 살아남은 건물이 있었어. 동문은 동강 나고, 서문은 서 있고, 남문은 남아 있고, 북문은 부서지고. 어때? 이해가 잘 되지?" "한번 들으니까 머리에 쏙 들어오는데요" 그 말이 재밌는지 소리 내 외우며 사부작사부작 걸어갑니다.


봉돈을 지나며 또 해설을 합니다. "옛날에는 전화기나 휴대폰이 없었으니까 나라에 큰일이 있어도 알릴 수가 없었거든. 봉화 전체에 불이 오르면 전쟁이 터졌다는 신호야." 동남각루 아래는 배롱나무꽃이 분홍 웃음으로 우리를 반겨줍니다. 시장길에서 아이스크림 하나 사줬더니 금방 나긋나긋해집니다. 싫다고 버틸 때는 언제고 수십 개의 계단을 나풀나풀 폴짝폴짝 뛰어오릅니다.


“소원아! 수원 화성은 누가 지었는지 알아?”
“정조대왕이 지었잖아요. 정약용이 거중기를 만들어서 인부들이 고생을 덜 하고 빨리 만들었대요.”
“너는 어찌 그리 아는 것도 많냐?”
“책을 계속 읽으니까 그렇죠. 우리 선생님이 그러는데 독서를 즐기면 지식이 늘어난대요.”
“이 책벌레야. 앞으로는 너를 똑똑 박사로 불러야 되겠다.”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성벽을 따라 걸었습니다. 청보라색 닭의장풀이 무리 지어 피어있습니다.
“소원아! 이 꽃 색깔 너무 신비하지 않냐? 예쁘고 청순한 것이 꼭 너 닮았다야. 너 올 줄 알고 이리 예쁘게 피었는갑다”
“그런 소리 하지 마세요. 때가 되어 핀 거지, 나 올 줄 알고 핀 게 아니라고요”
“생긴 것은 야들야들한 것이, 속은 어찌 그리 딱딱할꼬? 너를 똑똑 박사가 아닌 딱딱 소녀로 불러야 되겠다”
“내가 딱딱한 게 아니라 할머니 감성이 넘치는 거라고요.

"할머니 사진이나 한 장 찍어주라"

"내가 말했죠? 꽃 옆에서 사진 찍으면 손해라고, 예쁜 꽃과 늙은 할머니 얼굴이 비교되니까 찍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렇게 티격태격하며 서장대에 올랐습니다.


수원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입니다. 바로 아래는 행궁, 멀리 광교산과 월드컵 경기장, 뒤쪽으로는 서호 저수지도 보입니다. "소원아, 모든 성곽은 남쪽 문이 정문인데 수원화성은 북문이 정문이거든. 왜 그런 줄 알아?" "몰라요" "왕이 한양 궁궐에서 출발해 들어오는 첫 번째 문이고, 또 아버지 묘소 다녀올 때도 이곳으로 들어오니까 정문이 되었대"


잠시 땀을 식힌 후 다시 걷습니다. 화홍문에는 물소리가 졸졸거리고 왜가리와 오리가 놀고 있습니다. 용연의 버드나무는 긴 머리 아가씨처럼 바람에 가지를 휘날리고 있습니다. 방화수류정으로 오릅니다. 아무리 봐도 화성의 건축물은 전쟁을 대비해 지은 것 같지 않습니다. 시인 묵객들이 풍류나 즐겨야 할 것 같습니다.


“소원아! 할머니가 정조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왜요?”
“그 양반과 산책하다 보면 얘기가 잘 통했을 것 같거든. 정자 마루에 나란히 걸터앉아 시도 한 수씩 읊고 말이야”
“그건 안 될 말이죠. 할머니는 천민인데 어떻게 왕과 산책을 해요?”
“헐, 나, 천민 아니거든! 누가 그래? 할머니 천민이라고?”
“할머니 천민 맞잖아요”
“네가 뭘 잘 모르는 모양인데 나 왕족이야. 우리 할아버지가 김수로왕이거든. 내가 김수로왕 78대 손이야. 할아버지가 왕이면 그 후손들은 당연히 왕손 아니냐?”
“그래요? 진짜로요? 할머니가 왕족이었어요?”
물음표가 연거푸 쏟아집니다. 이 때다 싶어 목소리 가다듬고 훈시를 했습니다.
“이제 알겠다. 그동안 눈을 홀기면서 대들 때마다, 지체 높은 왕족한테 왜 저럴까 했더니, 할머니가 천민인 줄 알고 그랬구나. 알고 보면 나, 그렇게 함부로 대할 사람 아니거든. 그리고 왕족이 아니라고 해도 그렇지, 어디서 어른한테 그렇게 성깔을 부린다냐.”
“죄송해요. 할머니, 앞으로 짜증 안 낼게요.”
왕족이라는 말에 바로 꼬리를 내리고 사과하는 것이 어찌나 귀엽던지 속으로 웃었습니다. 정조 얘기를 꺼냈다가 뜻하지 않게 손녀 군기를 잡았습니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졌는데 손녀가 풀이 죽은 것 같아, 너도 할머니 손녀니까 왕손이라고 했더니 금방 또 헤헤거리며 뛰어갑니다.


할머니가 왕족이라는 사실이 신기하면서도 못 미더웠을까요. 저녁에 지 아빠가 퇴근하자 쪼르르 달려가 묻더군요. “아빠는 할머니가 왕족이라는 거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 그러니까 아빠는 할머니한테 공손하게 대하잖아. 할머니가 시키는 일이면 뭐든지 예 예 하는 거 못 봤어?" 지 아빠한테까지 확인하고 나니 믿어지는지 눈을 내리 깔더군요. 만만하게 굴 상대가 없어져 심드렁한 모양입니다.

"김소원, 지금까지는 몰라서 그랬으니까 봐주는데 앞으로는 왕손한테 깎듯이 대해라. 지켜보겠어"


산책도 하고 할머니 위상도 세우고 두 마리 토끼를 잡았습니다. 그런데 왕족 약발이 얼마나 갈지 심히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