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에게도 아침은 중요해
길들여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행동방식이 지극히 FM 적이고 고지식한 남편. 남편에겐 길고양이 원남을 만나며 생긴 하나의 철학이 있다
길고양이에게 마음을 주지 않을 것. 그리하여 대문 앞에서부터 허스키하게 애웅 애웅-하며 아는척하는 고양이를 짐짓 흐뭇하게 바라보다가도 늘 거기서 끝이 난다.
집 아이들과 같은 따듯한 쓰다듬도 없고 리드미컬한 궁둥이 팡팡도 없다.
원남 역시 남편에게 밥 이상은 요구하지 않는 듯했지만 나는 그런 남편의 모습이 조금은 차가워 보여 '그래도 한 번이라도 만져봐 주지 그래' 하며 오지랖을 펼쳤으나 돌아온 남편의 대답에는 나름 소신이 묻어있었다
"정들면 안 돼"
길고양이와 사랑에 빠진다는 건 , 불현듯 안녕이라는 이별에도 익숙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유독 포실포실한 털 짐승들에게만 유약한 멘털을 자랑하는 우리 부부에게 그런 일이 가능할 리가 없다.
우리는 한 번의 이별에도 마음이 찢기고 눈물을 펑펑 쏟아낼 것이 자명하기에 남편의 소신 있는 결정에 그저 조용히 지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고양이를 앞에 두고 만지지 못하는 고통은 ,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지 않는 행위와 같다.
저 노랗고 투실투실한 궁둥이를 보고 어찌 참을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원남과 남편은 나뭇가지 하나에 감정을 실어 보내는 뻣뻣한 사이가 되었다. 이 노란 놈이 귀여워 보일 때 나뭇가지로 쿡쿡 눌러보는 것인데, (찌르는 거 아님) 원남은 아랑곳 않고 본연의 임무에 (숨도 안 쉬고 고양이 캔을 먹는 행위) 충실한 걸로 나름의 긍정 어린 대답을 하였으며, 남편은 그사이 나뭇가지로 등도 만져보고 탄탄한 허벅다리도 눌러보며 원남이의 신체구조를 (?) 탐색한다고 했다.
"그게 만지는 거랑 뭐가 다르냐?"라고 되물었을 때도 남편의 대답엔 소신이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이야"
그렇게 '길들여지지 않기 위한 방어선' 안에서 서로의 욕구를 채워가며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남편에게 고민이 생겼다.
"원남이가 시도 때도 없이 와서 밥을 달라고 하네"
원남의 출근시간은 점심 12시에서 1시 사이. 문밖에서 허스키한 애웅 애웅 소리가 들리면 밥시간이다.
야무지게 캔 두 개를 말아주면 허겁지겁 먹곤 어디론가 사라져 6시쯤 다시 출몰하는데 조금 늦어질 때도 있고 안 올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땐 밥그릇에 캔을 가득 부어두고 퇴근을 하면, 아침에는 모두 사라져 있었고 그것이 원남의 흔적이라 생각했기에 , 오나 안 오나 늘 4개의 캔은 원남이의 몫이었다.
그런 원남이가 아침에도 출몰해 밥을 달라 농성 중이라는 것이다. 고지식한 면이 있는 남편은 왜인지 이 고양이가 약간은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고 , 원남에게 정중하게 요청했다.
'이건 약속과는 다르다. 매번 오던 시간에 와달라'
원남은 몇 번의 아침 농성을 거절당한 후 다시 점심시간에 출석을 하는 걸로 서로 간의 요구 협상이 완만히 조율되는듯하였으나, 매번 야무지게 완밥하던 걸, 반 이상 남기고 사라지기를 반복. 그 밥을 동네 떠돌이 개나, 다른 뉴페이스 고양이들이 줏어먹는 모습이 발견되었고. 그 후로 원남의 발걸음이 뜸해지기 시작했다
원남이가 오지 못하는 이유가 다른 뉴페이스들의 등장이라 생각한 남편은 밥 주기를 일시 중단하였고 그나마 드물게 방문하던 원남이의 발길도 뚝 끊겨버렸다. 남편은 약간 우울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야속한 겨울이 시작되었다.
매서운 한파가 기승을 부렸고, 밥그릇에 쌓인 눈이 꽁꽁 얼어붙어도, 남편은 그 밥그릇을 쉽사리 치우지 못했다.
"내가 그때 아침만 줬었어도.."
특유의 허스키한 앵앵-소리가 문밖에서 들리는 것 같아 문을 열어보면 그저 싸늘한 겨울바람만이 쉭쉭 소리를 내며 원남이의 빈자리를 서글프게 채우고 있었다고 한다. 까슬까슬 무미건조한 장작더미 같은 내 남편에게서 원남에 대한 걱정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 끼에 캔 두 개를 말아먹는 놈이 어디 가서 굶어 죽진 않았을지. 얼어 죽진 않았는지, 찬바람이 기승이면 더욱 걱정되어 맘이 시렸다고 한다. 노란 고양이 놈은 그렇게 물에 물 탄 듯, 남편의 방어전선 안으로 훌쩍-뛰어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꽁꽁 얼어붙은 밥그릇 안의 눈이 녹아 찰랑거릴 때쯤 문밖에서 다시 애웅-애웅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꼬리가 뭉툭하고 볼이 뚱실 뚱실 한, 체구가 작은 노란 고양이. 원남이었다.
원남이는 사라졌을 때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고 남편은 이미 원남이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캔과 수저를 들고 뛰쳐나갔단다.
감격스러운 조우.
다음날 출근한 남편 차 앞에서 위풍당당 밥을 내놓으라 소리 지르는 원남이에게 허겁지겁 캔을 까서 바치는 남편의 모습은, 더 이상 '길들여지면 안 돼'라고 자신 있게 외치던 그 쿨한 남자가 아니었다 그저 한 명의 호구만이 있었다. 그렇게 원남이는 아침 9시에 아침, 12시에 점심, 6시에 저녁을 먹는 것으로 남편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으며 우리는 하루 한 끼 160그램의 캔 2개를 상납해야 했다.
인간은 고양이를 이기지 못한다. 귀여움은 늘 모든 것을 이기기 마련이고,
귀여움에 인생 몰빵을 한 것이 고양이라는 존재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