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출장, 미숙함의 스냅샷

[싱가폴 Artspace @Helutrans] Artist’s Proof

by 앙떼뜨망

Artist’s proof이란 리미티드 에디션 결과물을 만드는 과정에서 작가가 혼자 간직하는 밑그림 단계의 결과물이다. 이후 작가가 경매로 팔거나 도둑질당하는 특수한 몇 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artist’s proof는 숨김처리된다. 빛나는 결과물보다도 수가 적고, 또 본 작품에는 없는 실수와 얼룩을 발견할 수 있어서 가끔은 작품보다도 비싸게 거래되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정규직이 된 후 첫 교육을 받기 위해 싱가폴에 갔다. 7월 말의 싱가폴이라니, 상상만 해도 더울 것 같아 걱정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해 보니 정오에도 서울보다 시원했고, 저녁이 되면 오히려 기분 좋게 서늘하기까지 했다.


다양한 싱가폴의 풍경들


일요일에 일찍 공항에 도착해 세 개의 전시회를 방문했다. Tanjong Pagar 지역에는 SAM (Singapore Art Museum)을 중심으로 열댓 개의 아트 갤러리와 미술관으로 둘러싸인 예술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Artspace @ Helutrans 앞에는 특히나 사람들이 몰려 있어서 이유가 궁금했는데, 알고 보니 그냥 무료로 음료를 나눠주고 있었다. 세상 어디를 가든 누구나 공짜는 좋아하는군.



싱가폴은 올해로 환갑을 맞았다. SG60를 기념하는 포스터가 거리 곧곧에서 눈에 띄었다.


싱가폴처럼 철저히 계산된 국가는 전 세계적으로 단 하나이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출발해 인도네시아의 아픈 손가락이 되었다가, 이제는 글로벌 금융의 중심지가 된 싱가폴. 한 명의 개인도 이 정도로 빠르게 변화하고 발전하기 어려운데, 이 국가는 단 한 명의 창의적 비전으로 인해 변모에 변모를 거쳐 지금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그 사람은 리콴유.


자세히 보면 "lee kuan yu", "singapore" 등의 레터링으로 점철된 그림

자원도 없고 인구도 적고, 그나마 있는 인구의 문맹률과 실업률은 처참할 정도였던 60년 전의 싱가폴. 리콴유는 한국과 유사하게 개발도상국들이 선택하는 전략들을 택한다. 단순 반복 노동 작업인 항만과 해운 물류 산업에 집중하고, 동시에 해외 기업들에게 문을 활짝 개방한다.


이후 80년대부터는 인건비가 비싸지기 시작하고, 리콴유는 싱가폴을 아시아의 금융 허브로 자리매김할 비전을 그린다. 시민들의 교육과 외부인의 관광을 중심으로 성장한 결과, 싱가폴은 현재 세계에서 손꼽히는 금융·물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전시는 오로지 싱가폴의 역사와 부흥만을 설명하지 않는다.

현지인의 눈으로, 관광객의 눈으로, 예술가의 눈으로, 학생의 눈으로 본 60년간의 싱가폴이 보여준 모든 순간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하나의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Be/Longing - Suzann Victor 2025


커다란 원형 작품 아래에는 1950년대 동남아시아의 풍경이 사진과 그림이 뒤섞여 있다. 그 위를 크기가 서로 다른 투명한 아크릴 원판들이 겹겹이 덮어, 관람객은 어느 각도에서, 어떤 거리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이미지를 보게 된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위치에서든 이 작품 전체를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대부분의 장면은 바다 위에서 배를 타고 낚시를 하거나, 이동을 하거나, 물품을 거래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1950년대 해상 생활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갔던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일상을 그려낸 것이다.

최근 십여 년간 전쟁과 인민 이슈가 재조명되며 바다와 배, 그 위의 사람이라는 모티프는 전쟁과 이민 문제와 함께 떠올려지곤 하지만, 이 작품은 잠깐 멈추고, 다시 한번 과거의 맥락을 되짚는다. 작은 배에 빽빽이 몸을 싣고 바다를 오갔던 사람들에게 배와 바다란 곧 자유의 상징이자 삶의 터전이었음을 다시금 환기시키는 것이다.


큰 그림 전체를 한눈에 보기란 쉽지 않다. 모두 지나기 전까지는.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행된 교육에서는 호텔 콘퍼런스룸을 빌려서 아시아 각국에서 온 (비교적) 신입사원들과 함께 브랜드 빌딩의 기초에 대해 배웠다. 운이 좋게 정말 똑똑하고 착한 조원들을 만나 마지막 최종 발표에서 1등도 했다! ㅋㅋㅋ



교육 자체도 좋았지만, 더 기억에 남은 건 그 방 안에 있는 아이들의 얼굴이었다.

그리고 회사에서 십 년 이상 남아 성장해 전문가로 인정받아 신입사원들을 교육하러 온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마주 보고 있는 아이들이 될 얼굴들이었다.


Artist's proof는 완성된 싱가폴이 아닌, 그 과정에서 온전히 존재해 왔던 싱가폴의 순간들을 기념하는 전시였다. 불안정했던 60대를, 변화의 시동을 건 70대를, 정체성을 바꾸기로 한 80대를, 그리고 그 모든 과정에 데리고 온 지금을 기념하는, 그리고 앞으로의 싱가폴의 모습을 그려보는 전시였다.


나는 나중에 저 얼굴을 하고 나면 과연 지금의 얼굴을 그리워할까?


East Coast Beach


교육이 끝나자마자 혼자 바다로 갔다.

나는 바다에 갈 때마다 모래로 밀려오는 파도의 패턴에 매료된다. 내 발을 한참은 쳐다봤다. 파도는 가끔은 내 발끝에도 못 올 때도 있었고, 한 번은 몇 번 연속으로 내 무릎까지 올라왔다.

발에 난 미세한 상처에 염분이 닿아 따끔거렸다. 아픈데 돌아가기는 싫었다.


해가 좀처럼 지지 않았다.




번외로 하나 더 소개하고 싶은 작품:

Yellow on Yellow - Lee Wen 2014


작가 Lee Wen은 1957년생으로, 싱가폴과 거의 동시에 태어났지만, 안타깝게도 더 어린 삶을 마감했다.

원래 투자은행에서 일을 하던 그는 퇴근을 하면 무언가를 끄적였다고 한다. 그 시기에 어른의 세계에 내던져진 아이에 대한 그림책은 그의 가장 솔직한 작품들 중 하나이다.

예술적 소명을 이기지 못하고 서른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본격적으로 예술 교육을 받기 시작했고, 곧이어 싱가폴 예술계에서 행위예술로 중요한 인물로 떠오른다. 그러다 파킨슨 병에 걸리고, 더 이상 몸을 매개로 예술을 하지 못하게 된 Wen은 2019년 사망하기 5년 전에 이 작품을 완성했다.


욕조에 찰랑이는 얕은 물에 나체를 뉘었다. 모순적이게도 그 뒤에는 끝없는 바다가 찰랑인다.

손에 얼굴을 뉘었지만, 노란색 페인트로 가려져 표정은 안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