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산 아모레퍼시픽미술관] 마크 브래포드 - Keep Walking
올해 8월, APR이 아모레퍼시픽의 시가총액을 뛰어넘었다.
조금 놀랐다. 90-00년대생 여자라면 학창 시절에 이름을 들으면 가슴이 떨렸던 브랜드들은 죄다 아모레퍼시픽 브랜드들이었으니까. 에뛰드 틴트, 이니스프리 노세범 파우더, 라네즈 립슬리핑 마스크, 헤라 파운데이션... 이름만 들어도 친구들 사이에서 한 번쯤은 써봤을 법한 제품들이다.
그 당시만 해도 아모레퍼시픽은 회사 모토인 "Be the first and the best"이 표명하듯이, 부동의 1위를 몇십 년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판이 달라졌다. 2025년 8월 6일, APR의 시가총액이 7조 9322억 원을 기록하며 아모레퍼시픽(7조 5339억 원)을 넘어섰다. 이어 8조 7500억 원까지 치솟으면서 K-뷰티 업계의 새로운 1위 자리를 굳혔다.
APR은 오래되지도 않았고, 브랜드 수도 적다. 하지만 이 회사는 전통적 화장품이 아닌, 메디큐브라는 브랜드를 중심으로 뷰티 기기와 기능성 화장품이라는 새로운 흐름에 올라탔다.
대표 제품인 메디큐브 AGE-R 라인은 누적 400만 대 이상 팔렸고, 2025년 2분기 매출만 해도 전년 대비 두 배가 넘는 3277억 원, 영업이익은 846억 원(2.0x)이었다. 같은 시기 아모레퍼시픽의 영업이익은 801억 원이었다.
주목할 만한 점은 해외 비중이다. APR 매출의 78%가 해외에서 발생했고, 특히 미국 비중이 30%에 가까웠다. 일본과 유럽에서도 white space expansion이 이뤄지고 있다. APR이 에이프릴스킨으로 시작할 때부터 애초에 장점으로 꼽혔던 소셜 플랫폼 (틱톡, 인스타)에서의 존재감을 주축으로 해외로의 확장까지 가능했던 것이다.
데이비드 치퍼필드가 디자인한 아모레퍼시픽 사옥은 세련됐다. 4년 전 교내 대회 때문에 처음 방문했을 때에는 이런 곳에서 일하면 출근도 즐거울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의 시선으로 보니 적어도 지금 당장은 사원들이 참 힘들게 다닐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마크 브래드포트전을 보며 거대 자본과, 이미 완성된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허점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작품들 자체는 흥미롭고 작품 공간은 아모레퍼시픽 미술관인만큼 훌륭했지만, 작품 해석과 구성이 참 현학적으로 느껴졌다.
거대한 흑인 동상이 알록달록한 페인트를 뒤집어쓴 채 매혹적인 자세로 쓰러져있다.
흑인과 퀴어 문화에서 저항과 프라이드를 표명하던 볼룸 (ball room) 문화의 보깅 포즈 중 하나인 “데스 드롭”을 그려낸 것이다.
사실 이 설명으로도 충분할 텐데, 이 작품의 해석 글은 아래와 같다:
나아가 흑인 청년들이 총에 맞아 쓰러지는 장면, 그리고 십자가 위 그리스도의 모습과도 연결된다. 상반된 의미들 이 공존하는 <데스 드롭>은 기쁨과 두려움, 존재와 상처 사이의 감정, 취약성과 회복 사이의 긴장을 드러낸다.
동의하기 힘들었다.
그다음 작품인 엔드페이퍼 연작을 보며 나의 의구심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믿음의 배신 해석:
작품 제목인 "믿음의 배신"은 신념이 흔들리는 경험 속에서 오히려 개인의 자율성과 회복력이 드러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격자 구조는 통제를 상징하기보다, 지 나간 흔적과 앞으로 펼쳐질 미래의 길이 교차하는 열린 구조로 기능한다.
비슷한 재료와 모티프로 만들어낸 작품들이 제목에 따라 근사한, 하지만 표면적인 의미를 부여받는 것을 보며, 작가의 진짜 의도는 무엇이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의 최근 인터뷰를 몰아 읽었다.
그가 정치적인 예술을 한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자라왔던 흑인 위주의 동네에서 흔히 찾을 수 있던, 그리고 억압받는 집단을 나타내는 엔드페이퍼와 기차표, 포스터 종이 등 일상의 소재들을 주로 다룬다.
하지만 인터뷰들에서 얻은 인상은: 그의 작품들은 지극히 개인적인 동시에 해학적이다.
My art practice goes back to my childhood, but it's not an art background. It's a making background. I've always been a creator.
제 예술은 어린 시절로 회귀되지만, 흔히 말하는 “예술적” 배경에서 오지는 않았어요. “만드는” 배경에서 왔죠. 전 항상 ”창조하는 사람“이었어요..
My mother was a creator; my grandmother was a creator. They were seamstresses. There were always scraps of everything around. There were always two or three or four projects going on at the same time. We just never had an art word for it.
제 어머니도 “창조하는 사람”이었고, 제 할머니도 “창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재봉사들이었어요. 집 곳곳에는 항상 천조각들이 있었고, 세네 개의 프로젝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다만 그걸 지칭할 용어만 없었을 뿐이죠.
또,
But I would go to the museum as a child, and I was bored. They would tell me about art, and I would look around and say, "This is art." Then l'd get on the bus and go home. It never touched me. But the projects at home touched me. For instance, making the signs for the prices at my mother's hair salon: I was in charge of that, so l taught myself calligraphy.
저는 어렸을 적 미술관에 가곤 했는데, 매우 지겨워했어요. 그들은 제게 예술이 무엇인 지 설명했고, 전 주위를 돌아보며 "이게 예술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고 버스를 타고 집에 왔어요. 미술관은 저를 감동시키지 못했어요. 하지만 집에서 흔히 보는 프로젝트들은 절 감동시켰습니다. 예를 들어, 어머니의 미용실 내에 가격표를 만드는 것: 그건 제 역할이었고, 그래서 캘리그래피를 독학했어요.
이 제목도 사실 유명 드라마 시리즈 “왕좌의 게임” 에서 가져온 것이고,
이 작품도 알록달록한 배경 위로 볼룸 문화에서 아이코닉한 노래인 “Here comes the hurricane, bitch”의 가사를 적은 유머러스한 작품이다.
전시의 구성과, 개최된 공간, 입장하면 친절히 오디오 가이드 작동법을 한 명 한 명 알려주는 직원까지, 구성에 있어서는 단점을 찾을 수 없는 전시였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진짜를 찾을 수 없었다.
안 맞는 포장지를 찾아 덮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무섭게 떠오르는 챌린저 브랜드들과 비슷한 질과 성능의 피부 케어 라인을 내놓고, 브랜드 파워 하나만을 근거로 가격을 올리고 절대 지지 않는 태양일 것이라고 믿는 자만은 경계해야 한다.
한때는 화장품도 생필품과 마찬가지로, 더 이상의 혁신은 상상할 수 없는 멈춘 시장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진짜 JTBD (Job to be Done)은 "얼굴에 화장품을 바르는 것" 이 아니라 "피부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가격대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쌌음에도 APR이 승리하게 된 것이다.
APR과 아모레퍼시픽의 대조가 마크 브래드포트 전시에서 느낀 인상과 겹쳐 보였다.
겉보기에는 화려한 공간 내에 정교한 해석으로 가득했던 전시였지만, 정작 - 되려 더 감동적일 수도 있는 - 작품의 "진짜" 의미는 담아내지 못했다.
이제 소비자도, 관람자도 그러한 얄팍한 포장에 움직이지 않는다. 실질적인 효용과 느낄 수 있는 감동을 찾는다.
K-뷰티의 새로운 1위 자리에 선 APR의 성공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 진짜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미 완전히 설립된 브랜드는 언제 다시, 어떤 모습으로 그 진짜를 보여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