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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선우 Mar 15. 2022

성인물의 소재로서의 타락엔딩

강간 신화와 강간소재 성인물에 관하여

이 글은 성인물의 소재로서 성범죄, 특히 강간을 다루고 있으며 결단코 현실에서의 성범죄를 옹호할 생각이 없다.

이하는 야한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성인물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내용이 내용인 만큼 취향에 없으면 돌아 나가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먼저 확고하게 할 것은 이하의 논의에서는 해당 저작물이 생산및 유통되는 과정에서 어떠한 실질적 피해자도 발생하지 않았던 창작물, 즉 순수하게 창작된 소설,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에 관해서만 다루며 스너프 필름과 같은 물건은 논외로 친다.

또한 이 논의는 그런 작품을 주로 그리고 즐기는 사람들이 잠재적 성범죄자가 될지도 모른다!에 대한 가정은 하지 않는다.




타락엔딩은 소위 흑화 라는 표현으로 주로 사용되며, 기존에 선량했던 인물이 결말에 이르러 그 전과는 반대되는 악한 성향으로 변모하는 것을 뜻한다. 성인물에서의 경우 주로 성범죄를 경험한 피해자가 그 일을 계기로 성적으로 문란해진다는 결말을 맞는 것을 말한다. 


내용적 측면에서는 사실 타락엔딩과 같은 판타지적 전개가 들어가지 않을 경우, 그 결말은 현실적일 때 법적 처벌, 극적으로 전개되면 자살, 자해, 미혼모, 약물 중독과 같이 다소 불편한 결말을 맞는 경우가 많고, 그것이 가해자를 향한 복수의 노선을 타면 장르가 에로에서 스릴러나 드라마로 빠져 버리기 때문에 작품 전체의 무게감을 좌우해 버리기에 선택될 수 밖에 없는 결말중 하나이기도 하다.


너는 어디 구석진 곳까지 가서 자꾸 그런것만 보고오냐, 라고 생각할수 있겠지만, 의외로 수요와 공급이 꽤 많은 편이고, 해당 소재만 주구장창 사용해서 유명한 제작자들도 있다. 이런 인기는 소위 강간 판타지 혹은 강간 신화라고 불리는데서 기인한다. 이는 간략하게 말해, 싫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피해자 역시 즐기고 있을 것이다라는 것, 그리고 싫다고 말했던 상대를 자신의 성적인 능력으로 정복하는 것에 관한 판타지이다.


일단 강간을 소재로 한 작품에 대한 범주는 의외로 상당히 모호하다. 문화와 성별 등에 따라 거부표현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폭력이 포함되거나, 피해자가 끝까지 저항한 경우는 명백하게 강간으로 분류 하지만, 연인이나 부부관계에서 한 쪽이 원치 않는다는 표현을 하였을 때, 그리고 관계 중 혹은 후에 피해자가 성적 흥분을 느꼈다는 표현이 있을 때 국가와 제작 시기등에 따라 어떤 사람은 화간으로 분류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강간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타락엔딩은 그 모호한 지점에서 보통 시작된다.


강간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피해자는 성녀-창녀의 논의를 명백하게 따른다. 이는 남성중심의 서사에서 여성을 어머니, 여동생, 내 아이의 어머니 등 성스럽고 지켜야 할 존재로 보는 것과 창녀, 말 그대로 성매매업 종사자나 사기꾼, 문란한 파트너와 같이 징벌해 마땅한 존재로 이분화 하여 다루는 것을 의미한다. 성범죄를 소재로 한 작품 중 시작부분에서 피해자가 자위를 하거나 자신의 안정적 파트너(연인, 배우자 등)와 성관계를 갖는 중 만족하지 못하는 장면이 나오는 경우들이 있다. 이를 통해 해당 피해자가 창녀의 포지션에 가깝고 그와 같은 범죄 피해를 입어 타당하다 라는 합리화를 제공하며, 성적으로 문란하기 때문에 그와 같은 일을 겪으면서도 성적 만족과 흥분을 느꼈다 라는 핍진성을 제공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캐릭터 설정과 전개는 독자에게도 정신적 완충지대의 역할을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미움받는 것을 꺼린다. 매슬로우 욕구 이론의 애정과 소속의 욕구 때문일 수도있고, 진화학적 측면에서 외따로 떨어지고 미움받는 것이 생존에 부정적 역할을 해서일수도 있지만, 어쨌든 대개는 미움 받는 것을 꺼린다. 피해자의 타락은 독자가 주로 이입하는 존재 (보통은 가해자)의 행동이 나쁜 것이 아니며 피해자에게 미움 받지 않는다 라는 분위기를 작품 저변에 깔아 준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독자들에게 위안감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를 반대로 사용하는 창작물들도 있다. 피해자의 타락이 성적 만족감이 아닌 성적 학대에 의한 정신적 붕괴에 의해 촉발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 역시 피해자에 대한 연민 보다는 처녀성이나 순결에 대한 신격화에서 기인한 것으로 몹시 소중한 것을 잃은 피해자가 이 전의 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현재까지도 널리 쓰이고 있는 성범죄 피해자의 삶은 완전히 망가졌다, 와 같은 관념들이 이것과 유사한 방향성에 해당한다.




강간 판타지는 전적으로 남성 중심의 시선에서 기인 한 것이지만, 성범죄를 주요 소재로하는 작가들 중 의외로 여성 작가나 여성이 주 독자층인 경우도 있다. 불과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순정만화 중 준강간에 가까운 강압적 행위를 남성 인물이 행하고, 여성인물이 그에 두근거림을 느끼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최근에는 남녀간의 사랑을 다루는 로맨스 장르에서 이러한 행태는 여성혐오라고 기피되고 있지만 BL에서는 여전히 보여지고 있다.


개인적으로, 이러한 작품의 선호와 생산을 사회적으로 성욕을 표출하는 것이 억눌려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라고 생각한다. 남성이 강압적인 성격의 작품의 여성주인공은 미성년자인 경우가 많았는데, 여성의 성욕에 대한 논의 자체가 시작된지 수십년 밖에 되지 않았고 그나마도 미성년자의 경우 보호자들에 의해 악행으로 터부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성적인 욕망은 가지게 되지만, 그것을 자의적으로 행할 때에 비난이 따르는 상황에서, 자신의 의지에 따르지 않았으나 결과적으로 성적 욕망은 충족 시켜줄 수 있는 어찌할 수 없이 유발된 상황에 대한 선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창작물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는 측면에서 몹시 안전한 욕망의 배출구 역할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여하간 이러한 창작물적 선호가 있음이 많은 수의 여성들이 그런 강압적인 관계를 즐긴다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 창작물에는 작은따옴표 혹은 구름 말풍선 이라는 기능이 있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위해를 가할만한 인물인지 아닌지 화면 밖에 있는 독자는 전지적 시점에서 다 알고 있다. 독자는 안전한 곳에서 인물의 강압적인 태도가 위험한 것이 아니란 것에 대한 충분한 인지를 하고 있는 상황임으로 마음놓고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제작자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창작자의 입장에서 가해자와 피해자의 행동 범위는 정해져 있고, 그 수위는 전적으로 창작자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이기에 성범죄 그 자체라기 보다는, 그런 컨셉으로 만들어진 안전한 연극을 제작하고 감상하고 있는 것에 가깝다.




마치며, 타락엔딩은 남성향과 여성향 양쪽 모두에서 잘못된 성가치관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여성향 로맨스에서 강압적 스킨쉽에 관한 요소들이 사라진 것 처럼 사회적 합의를 통해 이런 장르 자체가 줄어들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과, 여전히 그럼에도 어딘가에서는 또 수요와 공급이 이루어 지고 있다는 점에서 영원히 없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의구심이 많이 드는 소재가 아닌가, 하고 싱숭생숭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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